매일 매일이 달러와의 전쟁이라는 국내 러시아목재 최대 수입업체 동산의 심재동 사장. 유수의 대기업들이 무너졌던 아에엠에프를 통해 회사가 강해졌다는 것이 가장 큰 경영의 성과라고 말하는 그. 그의 이러한 자신감은 동산을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러시아목재는 매력 있는 아이템입니다. 일반목재에서 특수목까지 그 용도가 다양하죠. 인접한 산림국가로는 러시아가 최고입니다. 철도가 연결되면 하루면 도착하니까 물류쪽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대체재로서도 매력있는 아이템이죠."그는 러시아목재의 매력을 이렇게 표현한다.최근 목재시장을 주름잡는 인물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아이엠에프 이전 대기업 종합상사 출신들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반도목재를 거쳐 현대종합목재에서 탄탄한 목재경력을 쌓았다
"내가 모아두질 않았다면 불쏘시개나 용광로에 들어갈 운명들이었죠."건축역사인 동시에 임산의 역사인 목공구 수집은 목원대 이왕기 교수의 평생의 업이다. 흩어져 있던 도구를 모으는 그의 노력으로 사장될 뻔한 역사의 한 자락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과거 없이는 현재와 미래도 없는 법. 어쩌면 우리는 그의 공으로 지금의 현재와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을 그을 때 쓰던 먹통, 나무를 깎아내던 대패, 나무를 베어내던 톱……. 현대식 기계가 없던 그 옛날 사용했던 녹슬고 귀퉁이가 닳아버린 목공기구들이 정겹다. 시대의 퇴물로 사라질 자신들의 운명을 소중히 거둬준 주인이 존재했기에 낡은 모습이지만 나름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간 목공구를 찾아 나선 지 2
목재가 사향산업이라고 말한다면 당당히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신발사업이 사향이라고는 하지만 나이키는 당당히 돈만 잘 번다며 단순히 국내 시장만을 탓하지 말고 세계시장으로 눈을 넓혀가라고 충고하는 사람. 바로 그가 목재무역의 대가 하나코퍼레이션의 송문호 사장이다. "세계적인 목재회사 홈디포와 세계 2위 기업인 월마트는 팔고 있는 물건만 다를 뿐 같은 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지만 지난 3월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 기업 중 5위는 홈디포가 차지했습니다. 특수소매판매별 순위는 세계 1위를 차지했죠. 결코 목재가 사향산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중국에도 홈디포 스타일의 마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힘들다고만 하지 다른 산업들처럼 노력을 안 합니
까다로운 일본에 제재목을 10년 가까이 수출했다면 품질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목재는 수입만 하는 줄 안다면 오산이다. 비록 원자재는 수입하지만 역수출을 통해 국내 목재산업의 옛 신화를 되찾고 있는 대경종합목재 민윤식 사장을 만났다. 목재업에 몸담은 지 25년, 적지 않은 세월이다. "나무가 좋아서 일을 배웠습니다. 무역으로 시작해서 생산과 영업까지 두루 거치면서 창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그는 상당히 솔직했다. 목재는 사업하기 편한 아이템이라고 말한다. 소를 부위별로 팔 듯이 목재도 용도에 맞게 판매할 수 있는 점이 그가 목재업을 택한 이유다. 14년 전 창업한 이후 가장 어려웠던 일을 묻는 질문에 "이 일을 끝날 때까지는 계속 힘들 것 같습니다. 끈이 느슨해지면 그만큼 퇴보하는 것
우리나라의 주요 목재 수입국인 말레이시아는 2천만헥타아르가 넘는 방대한 산림을 소유하고 있는 목재자원 강국이다. 목재자원이 부족한 한국시장의 전망은 매우 밝으며 반제품보다는 완제품 위주의 수출로 전환하여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는 말레이시아 아부마카유?? 상무관을 만났다. 농림부 공무원을 시작으로 목재와 인연을 맺게 된 그는 말레이시아 수출공사 연구직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가구?목재가공조사를 통해 목재를 배우게 됐다. 그 후 주한말레이시아대사관 상무관을 발령을 받은 게 3년전, 이제는 어느 정도 한국에 적응해가고 있다."한국어를 하지 못해 처음엔 힘들었지만 영어로 소통이 가능해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갈수록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인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한국에 거주하고
산림국장 시절, 산림부의 독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그. 여전히 농림부 산하에 있는 산림청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는 그는 국내에 사방공사를 처음 시행한 인물이다. 격동의 시절, 칡대신 조림을 하면서 겪어야만 했던 우여곡절을 김영준 전 농림부장관을 만나 들어보았다. 올해로 그의 나이는 여든아홉이 됐다.2세기를 걸쳐 살아온 그의 인생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젠 그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는 일들을 역사책을 보듯 그를 통해 들을 수 있다는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여든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건강한 그가 임업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식목일을 제정한 것도, 사방공사를 한 것도, 헐벗은 산에 조림을 시작한 것도 모두 그가 한일이다. 그의 인생은
그에게 왜 무역만을 고집하느냐고 물었다.대답은 간결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기 때문에…….”목재산업은 분업화되는 것이 옳으며 제조를 잘하는 사람은 제조를, 무역을 잘하는 사람은 무역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목재무역 외길만 27년째 걷고 있다. 전문무역인의 역할이 점점 작아지는 게 가장 아쉽다는 산화실업 유재동 사장의 무역인생을 엿보자. 그의 이력서는 참으로 단출하다.남들처럼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닌 일도 없고 독립을 해서도 단 한 업체만을 꾸준히 발전시켜왔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그 어려운 시기들을 지나면서도 산화실업이라는 이름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사 문을 닫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한 사업가 축에 속하는 목재업계에서 그의 이름이 남겨질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현직 임산공학과 교수로는 최고 연장자인 정 교수는 임산공학이란 학문이 임학에서 분리되기 전에 학부생활을 했던 터라 변변한 강의 교재조차 없었던 시절이 가장 안타까워 전공서적을 9권이나 저술해 후배양성에 힘썼다. 여전히 학자로서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서울대 정희석 교수를 찾았다. 올해로 그의 나이는 63세가 되었다.전국 임산공학과 교수로는 최고 연장자인 그가 여전히 세계적인 학술지에 꾸준히 논문을 게재하고 국제 학술회의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은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해외교류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사람을 많이 만나면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보다 젊었을 때부터 참석했으면 좋았으련만 그 때는 나라가 돈이 없었고 변변한 지원도 없어서 힘들었던 게 아쉬울 뿐이죠”
한국목재신문 최초로 여성 CEO를 만났다.길을 걸으면서도 돈 벌 일을 생각한다는 그는 역시 경영자로서 충분한 그릇이었다. 망치 하나가지고 재생목드럼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의 (주)중앙목재공업을 세우기까지 억척스런 아줌마로 살아온 성옥돌 사장의 인생이야기를 소개한다. 초등학교 2학년을 끝으로 마친 학교생활 몸이 약해 잘 걷질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체육시간에 입을 운동복을 사주시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가뜩이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던 아이는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고야 말았다. 초등학교 2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인 아이가 바로 나다.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일을 돕기 시작했다. 집안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무하고 농사짓는 일은 내 몫이었다. 너무나 엄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자원을 다루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세실의 이원규 사장은 90년대 인도네시아 합판 수입의 창구가 세실로 일원화되면서 국내 합판 생산량보다 많은 수입량을 통솔해 중소기업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목재와의 인연은 난 엔지니어 출신이다. 합판을 생산하던 동명합판의 무역팀이 분사되면서 유림교역이 설립돼 서울사무소장으로 입사했다. 유림교역은 부산에 본사를 두었으며 서울, 홍콩, 싱가포르, 자카르타에 각각 지점을 두고 있었다.당시 대성목재의 합판설비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수리해 수출하면서 엔지니어링을 담당했는데 그것이 대성목재와 인연이 되어 MDF, PB, 마루판, 태고합판라인과 수지공장 설비를 담당하게 됐다. 인천에서 내가 한일 중 가장 큰 일이라 할 수 있는 이 일을
‘고지식하지만 합리적인 사람’ 그를 표현하는 적당한 말인 듯싶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너무 식상할지 모르지만 그는 정말 그랬다.미국 유학시절, 한국인의 좋은 이미지만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 교수.목재방부의 주역 김규혁 교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학자의 길을 걷기까지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안한 탓에 남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우습지만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가 고려대는 나와야 장가를 갈 것 같아서였다. 점수가 제일 낮은 학과를 찾았더니 농대였고 술 잘 사주는 고등학교 선배들이 있는 임학과를 선택했다. 이런 내가 교수가 되리라고는 별로 생각치 않았다. 4학년이 되고 진로를 결정할 때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남자는 명예와 돈을 다 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