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식하지만 합리적인 사람’
그를 표현하는 적당한 말인 듯싶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너무 식상할지 모르지만 그는 정말 그랬다.
미국 유학시절, 한국인의 좋은 이미지만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 교수.
목재방부의 주역 김규혁 교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Image_View학자의 길을 걷기까지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안한 탓에 남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우습지만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이유가 고려대는 나와야 장가를 갈 것 같아서였다. 점수가 제일 낮은 학과를 찾았더니 농대였고 술 잘 사주는 고등학교 선배들이 있는 임학과를 선택했다. 이런 내가 교수가 되리라고는 별로 생각치 않았다. 4학년이 되고 진로를 결정할 때 아버님이 말씀하시길 남자는 명예와 돈을 다 갖는 게 좋다고 하시면서 돈을 가지면 명예를 갖긴 어렵다고 하셨다. 말씀의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학자의 길을 걷기로 했다.


미국에서 공부했는데
석사를 마치고 유학을 결심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다가 미국을 선택했다. 내 입으로 일본말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이 미국 선택의 이유였다. 콜로라도주립대학에서 석사를 다시 했다. 영어 때문에 또한 한국에서 워낙 배운 것이 없어 고생도 많이 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는 목재역학으로 했지만 미시시피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전공을 목재보존으로 바꿨다.


유학시절 공부를 잘했나
공부는 정말 열심히 했고 잘했다. 미국의 두 학교 모두 그 전공으로는 내가 한국인 최초였다.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했다. 우습지만 한국에서는 잘 씻지도 않던 내가 매일 샤워를 했다. 서울올림픽 이후로는 한국이 많이 알려졌지만 내가 있을 당시 도서관에 가서 KOREA로 키워드를 치면 북한의 내용만 있지 남한은 더럽고 미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부러 라도 예의 바르게, 깨끗하게,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내가 곧 한국의 이미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교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박사과정을 마치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아이들도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결정도 없이 돌아와 시간강사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공채에 합격해 모교에 자리를 잡게 됐다. 유학시절 학생들에게 내가 배운 것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다행히 모교의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인생의 위기가 있었다면
난 죽을 고비를 많이 겪었다. 성수대교가 무너질 때 겨우 차 몇 대 앞에서 다리가 끊어지는 경험을 했고 캘리포니아 절벽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내가 막내이면서도 일년에 10번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조상님들 덕분에 여러번 내 목숨을 부지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고지식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내가 있어 왔고 그것에 대한 보답을 그렇게 라도 하는 것이다. 집사람은 나에게 윗사람 복이 많다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 미국유학시절 지도교수를 잘 만나서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요즘 고민하는 일이 있다면
여학생들의 취업문제이다. 가르친 여학생들 중 기업체에 취직한 학생이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고 여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입학성적이 남학생보다 우수하다. 목재업계가 변해야 한다. 토목이나 건축현장에서 일잘하는 여성을 쉽게 볼 수 있다. 유독 목재에만 여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고정관념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본다.


현재의 목재업계를 어떻게 보는지
목재분야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방부업계는 더욱 그러하다. 당장은 힘들어도 제대로 가는 길을 택하기를 바란다. 반드시 성장할 산업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주력하고 있는 연구분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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