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왜 무역만을 고집하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결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기 때문에…….”
목재산업은 분업화되는 것이 옳으며 제조를 잘하는 사람은 제조를, 무역을 잘하는 사람은 무역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목재무역 외길만 27년째 걷고 있다. 전문무역인의 역할이 점점 작아지는 게 가장 아쉽다는 산화실업 유재동 사장의 무역인생을 엿보자.

 

Image_View그의 이력서는 참으로 단출하다.
남들처럼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닌 일도 없고 독립을 해서도 단 한 업체만을 꾸준히 발전시켜왔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그 어려운 시기들을 지나면서도 산화실업이라는 이름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회사 문을 닫지 않은 것만으로도 성공한 사업가 축에 속하는 목재업계에서 그의 이름이 남겨질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그는 고집스럽게도 뭐든지 한가지만을 했다. 남들은 제조도 해보고, 무역도 해보고, 유통도 해보고 뭔가 잘 된다면 너도나도 나서는 업계의 현실로 볼 때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남양재 제재목 역사의 획을 긋다

그의 목재인생은 대학에서 무역학을 전공하고 1976년 동양화학의 계열사였던 청구목재에 입사하면서부터다. 78년부터 83년까지 5년동안은 말레이시아 주재원으로도 근무했다.
이후 83년부터 오퍼상을 시작하면서 그의 무역인생은 재도약을 시작한다. 말레이시아에서 5년을 지내면서 그는 동남아 무역통이 돼있었고 무역에 있어서는 누구못지 않은 누하우도 가지고 있었다.
86∼91년은 남양재 수입의 전성기였다. 주택 200만호 건설시대에 수요량은 엄청났다. 엄청난 제재목 물량이 들어오면서 워낙 물량이 많으니까 건가구 일을 대규모 가구회사들이 맡기 시작하면서 군소 라왕제재소들이 많이 무너졌다. 이때부터 국내에 라왕제재소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말레이시아산 제재목을 수입하던 업체 중 지금껏 남아있는 업체는 우리와 신원목재 정도입니다. 어려운 시기를 많이 겪기도 했지만 목재업계의 특성이 뭔가 하나 잘 된다면 너도나도 시작했다가 썰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런 관행은 아직도 여전하죠.”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과거의 자부심 넘치던 시절이 그리워 훈장이라도 가슴에 달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라고 덧붙이는 그의 얼굴에서 세월의 아쉬움이 뭍어난다.


수입유통업체 소규모로 존재해야
연안부두의 임대사무실을 전전하다가 가좌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지은 것이 92년, 그토록 원하던 사옥이 생기면서 산화실업은 품목을 확대해 MDF와 PB, 호주송과 뉴송원목도 수입하기 시작했다. 91∼92년은 산화실업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시기이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회사가 아이엠에프를 겪으면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건가구, 가구업체들의 잇단 부도로 인한 손해와 급격한 환율인상으로 인한 환차손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어렵게 마련한 사옥을 토지공사에 매각했다.
“서민들의 꿈이 내 집 마련이라면 사업하는 사람들 꿈은 내 공장, 내 땅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렵게 겨우 꿈을 이뤄놨는데 이건 내 잘못도 아닌 나라의 잘못으로 내 것을 빼앗기니 기가 찰 노릇이죠.”
집주인에서 졸지에 월세를 사는 세입자의 위치로 전락한 그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이엠에프 이후 대기업들이 목재사업을 포기하면서 실수요자가 직접 무역에 나서는 시대가 되어 전문무역업이란 개념도 모호해졌다. “굳이 내가 수입을 하지 않아도 필요한 사람이 직접 사다가 쓰니까 예전의 자부심도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목재의 수급을 맞춰주기 위해서는 수입이 필요하지만 이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통신과 금융, 물류가 발달하면서 굳이 전문성이 필요한 일도 아닙니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잘하는 일은 무역이니까 손을 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기업을 하려면 반드시 공익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 고용을 창출한다든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한다든지 불모지를 개척한다든지 하는 뭔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예전에 비해 많이 위축되어 현재 수입전문유통은 소규모로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작년에 그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아이엠에프때 매각했던 건물을 되찾은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손해도 많이 보고 주위의 만류도 있었지만 그는 실리와 명분의 사이에서 ‘명분’을 선택했다. 내집마련의 꿈을 다시 이루기 위해서였다.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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