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목재신문 최초로 여성 CEO를 만났다.
길을 걸으면서도 돈 벌 일을 생각한다는 그는 역시 경영자로서 충분한 그릇이었다.
망치 하나가지고 재생목드럼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의 (주)중앙목재공업을 세우기까지 억척스런 아줌마로 살아온 성옥돌 사장의 인생이야기를 소개한다.

 

Image_View초등학교 2학년을 끝으로 마친 학교생활
몸이 약해 잘 걷질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 체육시간에 입을 운동복을 사주시지 않는 어머니 때문에 가뜩이나 남에게 지기 싫어하던 아이는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고야 말았다. 초등학교 2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인 아이가 바로 나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일을 돕기 시작했다. 집안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무하고 농사짓는 일은 내 몫이었다. 너무나 엄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이 계모라고 수근거릴 정도였다. 어린 것이 맨발로 머슴처럼 일을 했으니 말이다.
또래 아이들이 뛰어 노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렇게 어린애가 일만 한다는 것은 요즘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은 정말 무섭다. 지금도 밥상 위에 밥그릇을 올려놓고 밥을 먹지 못할 만큼 나의 어린 시절은 정말 비참했었다.


고생을 각오하고 감행했던 결혼
열아홉이 되던 해에 남편을 만났다.
우리집은 3대째 인천 가좌동에서 살아오던 토박이였고 남편은 김포사람이었다. 당시 남편은 실업자였고 정말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다. 어린 마음에 이 남자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동정결혼을 결심했다. 변변한 집 한간이 없는 집에 시집을 간다고 하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당시 우리집은 의식주 문제를 걱정할 만큼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조건 시집으로 도망갔다.
변변한 잠자리, 하다못해 내가 쓸 밥그릇, 숟가락도 없는 집에서 살려니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한번 내린 결
정을 뒤집을 순 없었다. 그렇게 나의 고생은 또다시 시작됐다.


혼자 벌어 일곱 식구 살아가기 
결혼 후에도 끊임없이 일만해야 했다. 아무도 일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는 매일 술로 살았고 남편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린 시누이들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한번은 생전 처음 남대문시장에 가서 화장품을 사 가지고 와 동네 아가씨들에게 팔아 겨울을 나기도 했다. 그렇게 돼지도 사고 시장에 나가 장사도 하면서 3년을 일하니까 어느 정도 살만해졌다.
둘째까지 낳고 셋째를 가졌는데 만삭이 되어 내가 돈을 벌지 못하니까 집안은 다시 어려워졌다. 오죽하면 붉은 감이 고기로 보일 정도로 배를 곯았다. 동네에서 돼지를 한 마리 잡았는데 그 많은 돼지 내장을 나 혼자 먹어치웠다고 하니 정말 처절한 삶이었다.

 

제재소 망하고 다시 밑바닥부터
밤낮 술로 살아가시던 시아버지가 우리 식구를 집에서 쫓아냈다.
난 흙을 파서 벽돌을 찍기 시작했고 밤에는 이엉을 엮어 이발소를 지었다. 다행스럽게도 장사는 아주 잘 됐고 온 동네 돈을 다 쓸어간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게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시아버지의 횡포가 계속됐고 급기야는 신경성위장병에 걸려 장사가 잘되던 가게와 돼지를 팔고 인천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친정집이 있는 가좌동으로 와 정육점을 시작했다. 장사는 잘 됐지만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장사가 잘되고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정육점에 쌀가게, 식당까지 내게 되자 그런 일들은 돈을 버는 재미에 잊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돈을 버니까 남편이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 500만원을 투자해서 제재소를 시작했는데 가진 걸 전부 털어 넣고도 계속 적자를 면치 못했다. 거래처에 나가봤더니 직원의 횡령이었다. 거래처에서 돈을 받고 회사에 입금을 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공장도 정리하고 집도 넘어가고 수중에 남은 것은 600만원, 겨우 전셋집을 마련하고 조개를 잡으러 다녔다. 밥은 굶을지언정 아이들 학비만큼은 대줬다.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지 못한 설움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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