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임산공학과 교수로는 최고 연장자인 정 교수는 임산공학이란 학문이 임학에서 분리되기 전에 학부생활을 했던 터라 변변한 강의 교재조차 없었던 시절이 가장 안타까워 전공서적을 9권이나 저술해 후배양성에 힘썼다.
여전히 학자로서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서울대 정희석 교수를 찾았다.

 

Image_View올해로 그의 나이는 63세가 되었다.
전국 임산공학과 교수로는 최고 연장자인 그가 여전히 세계적인 학술지에 꾸준히 논문을 게재하고 국제 학술회의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은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해외교류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사람을 많이 만나면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보다 젊었을 때부터 참석했으면 좋았으련만 그 때는 나라가 돈이 없었고 변변한 지원도 없어서 힘들었던 게 아쉬울 뿐이죠”라고 대답하는 그.
40년이 훌쩍 넘은 그의 임업인생은 중학교 시절 한 선생님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임업은 정규과목이었다. 지금도 선생님의 이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그는 임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재홍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임업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쟁직후 황폐해진 산림을 복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당시 임업의 중요성은 당연했고 농업인구가 90% 이상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임학과를 졸업하고 임업공무원이 되고 싶었던 그는 참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ROTC 2기였던 그는 군 제대 후 춘천관리소의 임업직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안동영림서(현 남부지방산림관리청)와 임업연구원을 거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기에 이르렀다.


산림청 공무원으로 시작된 임업인생
66년 임학과에서 임산가공과가 분리되면서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임산가공 분리 1회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뭐든지 시작이 그렇듯이 변변한 교재 한 권 없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서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가 책을 많이 저술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후배들에게는 이러한 고통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쓰기 시작했지요. 내가 잘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해야할 일이었기 때문에 내가 한거죠. 덕분에 목재건조학, 목재이학, 목재절사학 등 전공서적 9권을 저술하게 됐지요.”
당시는 국내 합판이 주요 수출품목으로 자리잡고 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임산가공의 중요성은 날로 가중되고 있었다. 당시에도 목재건조는 공장 최대의 애로사항이었고 국가적인 문제였다.
임업연구원은 기업을 상대로 건조에 대한 교육을 많이 시켰고 그는 국책과제의 연구를 맡기도 했다.
목재건조로는 유일하게 정병재 교수의 맥을 이어 연구를 하게 된 그는 목재수율을 높이기 위한 건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대학교재로 저술한 책만 9권
그는 포스닥(박사 후 연수) 2기이다. 당시는 공업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던 시기라 농업분야에서는 겨우 1명도 나가기 힘들었지만 당당히 미국에 나가 건조학에 대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신학문을 배우고 돌아온 그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국제적인 학문 교류에 앞장서는 사람이다.
“국제임업연구단체연합회(IUFRO)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국내 최초로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격년마다 열리는 학회인데 아시아에서 참석하는 사람은 나고야대학의 가나가와 교수와 나뿐이었죠. 3회 때부터 참석했고 작년 7회 째는 일본에서 열렸어요. 40여개국 15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학문을 교류합니다. 그 안에서 목재건조연구회를 조직해 내년 8회 학회가 루마니아에서 개최됩니다. 내년에는 동료들과 후배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쉽진 않네요.”
지금은 중단됐지만 슬로바키아에서 국제 진공건조포럼이 열렸다고 한다. 95년에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다는 그는 임업대학이 별도로 있는 이 나라에서는 임가공분야에서만 7∼8개의 학과가 있다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는 역시 국제 학문교류의 선두주자다. 국제 학술회의에 12번의 논문을 발표하고 국외 정기학술지(SCI)에는 6편의 논문을 게재했다. 한편의 논문을 싣는 일도 쉽지 않은 현실에서 그의 노력은 탁월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 학술회의에 나가보면 미국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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