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을 다루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는 세실의 이원규 사장은 90년대 인도네시아 합판 수입의 창구가 세실로 일원화되면서 국내 합판 생산량보다 많은 수입량을 통솔해 중소기업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Image_View목재와의 인연은
난 엔지니어 출신이다. 합판을 생산하던 동명합판의 무역팀이 분사되면서 유림교역이 설립돼 서울사무소장으로 입사했다. 유림교역은 부산에 본사를 두었으며 서울, 홍콩, 싱가포르, 자카르타에 각각 지점을 두고 있었다.
당시 대성목재의 합판설비를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수리해 수출하면서 엔지니어링을 담당했는데 그것이 대성목재와 인연이 되어 MDF, PB, 마루판, 태고합판라인과 수지공장 설비를 담당하게 됐다.
인천에서 내가 한일 중 가장 큰 일이라 할 수 있는 이 일을 계기로 엔지니어였던 내가 목재를 직접 시작하게 됐다.


세실무역의 창업시절은
유림교역에 근무하던 시절,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합판을 수입하던 업체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인도네시아 수출협의회를 상대로 물량조절 및 가격협상 등을 진행하는 협의체에서 초대 사무국일을 보기도 했다.
그때는 목재업계가 잘 나가던 시절이라 일에 재미가 있었고 돈 버는 재미도 쏠쏠했다.
91년 세실무역으로 독립해 펄프수입을 계획했지만 진행이 늦어지자 할 일이 막막했다.
유림과 거래하던 곳은 건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신규개척만이 살길이었다. 생각해보면 91년은 막막한 한해였다. 당시 업체별로 수입량을 규정해놓은 쿼터량을 배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합판 수입은 할 수도 없었다. PB와 몰딩류를 수입하면서 세실무역의 입지를 굳혀갔다.


합판수입을 주도했는데
세실무역이 쿼터량을 배정 받게 되면서 점차 성장을 거듭하게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수입업체의 수를 25개에서 15개로, 급기야는 4개까지 줄였는데 그때 남은 업체가 국내 법인으로는 선경과 세실무역, 현지법인으로는 코린도와 남방개발 등 4개였다.
자원 없는 나라의 설움인지 인도네시아에 많이 휘둘렸었다. 설상가상으로 4개업체에서 2개업체만이 합판을 수입할 수 있게 됐고 결국 한국에서는 세실무역을 통해서만 인도네시아 합판을 수입할 수 있게 돼 3년반동안 인도네시아 합판을 독점수입했다.
98년 인도네시아의 무역이 개방되면서 단일 창구가 해제됐다. 지금 생각하면 신화와 같은 얘기다.


큰 금액의 신용장은 어떻게 열었는지
설립된 지 얼마 안된 소규모 유통업체가 4천만달러의 신용장을 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행이 우리회사를 믿게 하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마케팅아암(arms)제도를 생각해냈다.
말 그대로 세실무역이 몸(body)이 되고 당시 목재를 수입하던 대기업들이 가지가 되어 각 업체별로 수입합판의 할당량을 배정해주는 것이었다.
대기업들은 세실무역의 담보가 되어주고 합판을 수입할 수 있었던 세실이 오퍼역할을 해줌으로써 신용장도 열고 원만한 수입도 가능할 수 있었다. 결국 4천만달러의 2배인 8천만달러의 신용장을 열 수 있었다.
또한 첫달 무역의 이익인 9억원을 세실을 믿어주었던 기업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상호간에 신뢰가 쌓여갔다.


직원교육이 철저하다는데
강사를 초빙하여 직원들에게 매일 아침 영어교육을 시켰다. 또한 만 4년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목재교육을 시켰다.
덕분에 직원들은 누구 못지 않은 목재전문가가 됐다. 직원들에게 목재를 교육한 것은 내가 잘 모르고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난 엔지니어 출신이기 때문에 체계적인 목재교육이 누구보다 절실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여학생들의 취업문제이다. 가르친 여학생들 중 기업체에 취직한 학생이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고 여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입학성적이 남학생보다 우수하다.
목재업계가 변해야 한다. 토목이나 건축현장에서 일잘하는 여성을 쉽게 볼 수 있다. 유독 목재에만 여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고정관념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본다.


현재의 목재업계를 어떻게 보는지
독점수입이 해제되면서 인도네시아에 설립했던 합작법인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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