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재를 실은 트럭이 최근 서울 인근에 내린 국지성 호우에 젖어 빨간불 앞에 서 있다. 업계에서는 오는 9월부터 계절적 요인으로 파란불이 켜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설재 시장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반적인 관측이다. 서범석 기자 seo@woodkorea.co.kr
일식집 앞에 스파게티집 입간판이 놓여 있다면 과연 그것이 어울리는 일일까? 현대다축보링의 홈페이지에 왜 전국 날씨 팝업창이 떠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무조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해서 성공적인 웹 서비스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꼭 필요한 정보를 최소한의 절차와 노력을 통해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운쉬프팅의 미학이 오늘의 카피가 된 것이다. 한 번에 하나씩첫화면에서 가장 시급히 수정해야 할 부분이 바로 회사 소개이다. 회사주소나 사업자등록번호 등 회사의 개요를 알릴 수 있는 컨텐츠를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한 화면에서도 여러 곳에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풀어놓는 것은 역효과 만점이다. 중요한 것 일수록 적절히 강조하고 단 한 곳에 집중시켜야
1980년, 인도네시아는 원목수출 중단을 선언하고 자국의 자원으로 스스로 합판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많은 해외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자국에 외자를 투자하는 자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세금을 감면해 주겠다던지, 과실송금을 확실히 보장해 주겠다거니 하는 내용들이었다. 다소 불리한 내용도 있었다. 현지인을 100% 고용해야 한다거나 합판 공장 건설 후에는 제재 공장을 꼭 건설해야 한다던지….자국 사람의 고용을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기계는 100% 새 기계를 가져와야 된다고 돼 있었으나 당시 인도네시아에 투자하는 회사들은 국내의 헌 기계를 사서 페인트를 칠해 마치 새 기계를 가져오는 듯한 편법을 쓰는 수가 많았다. 당시 효성물산 산하에 있던 대성목재도 원자재 가
1990년대 초 칠레에서 수입된 집성목이 한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집성목이란 라디아타 파인을 1인치~2인치 두께로 제재해서 그것을 횡방향으로 접착해 3×6사이즈로 만든 것이었는데 , 음식점의 식탁 또는 솔리드(solid) 원목가구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이 제품을 처음 수입한 회사는 당시 칠레원목 수입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던 효성물산 목재부였고 그 후 대신목재(당시 대표이사 김상훈)가 칠레 집성목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국내에 시판했다.당시 필자는 (주)코마 라는 원목수입상을 하고 있을 때이었는데 효성물산으로 부터 칠레 집성목을 받아서 국내에 시판하기도 했다.상황이 이럴때 인데, 1994년이라고 기억된다.임업연구원(현 국립산림과학원)의 한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긴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방문해 줄 수
서원상협(주)는 오래 전 리뷰한 적이 있는 사이트이다. 당시에 지적했던 새창 뜨기의 제어나 고객과의 상호 교감을 유도할 수 있는 인터렉티브의 보완 등은 충분히 개선된 것 같아서 만족할 만하다. 대신 전체적인 디자인은 현대적으로 바뀌었지만 원목의 이미지를 살리는 데는 다소 초점이 흐려진 듯하다. 원목의 느낌 살린 배색 택해야원목의 느낌과 파스텔 톤은 어울리지 않는다. 인쇄물 디자인의 경우와 웹 디자인의 경우는 배색의 원리가 다소 다르다. 인쇄물은 안료를 섞어서 만들어내는 색감이지만 웹 디자인은 빛을 섞어서 만들어내는 색채이다. 원목의 이미지를 살린다고 해서 반드시 나뭇결 무늬나 갈색 톤의 색채를 사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파스텔 톤이나 형광색 계열의 사용은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분위기를 살리
85년 봄학기부터 필자는 대성목재에 재직하면서 강원대학교에 ‘해외원목개발’이라는 강좌를 개설하고 강의를 했다. 그때는 대성목재 원목과 차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는데 강원대학교에서 사람을 보내 강의를 부탁해 왔다.당시 학계에는 남양재원목에 대한 실전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을 가진 분이 별로 없었을 때였고, 필자가 쓴 ‘노란책’이 강원대학교에까지 소문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그런데 막상 부탁을 받고 보니 망설여졌다. 일주일에 한번 하는 강의였지만, 회사일을 하는 회사원이 새벽부터 서둘러 춘천까지 강의를 하러 내려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보수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망설임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곧 바뀌었다. 내 작은 수고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사회에 나오기 전 남양재에
1986년 유원건설이 대성목재를 인수한 후 원목과와 수입과를 통합했는데 통합된 원목과의 부서장을 필자가 맡아서 일을 보게 됐다. 그런데 그때 SBLC에서 들어오는 원목이 몇 차례나 분량미달 사고가 발생되었다. SBLC는 일본의 ‘니쑈이와이’가 PNG에 투자한 원목개발업체 현지법인이다. 정확을 생명으로 하는 일본업체가 계속해서 분량미달 사고를 내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이영기 사장은 필자더러 한번 나가서 체크해보라고 출장을 명했다. 그해 4월, PNG의 수도 포트모레스비를 거쳐 뉴브리테인섬에 있는 작은도시 킴베(Kimbe)에 도착, SBLC의 캠프를 찾았다.SBLC의 부사장 이시하라씨는 필자를 반갑게 맞이하며, guestroom 중에서도 제일 좌측에 있는 특별실을 배려해 주었다. 다른 gestroom들은 목욕실
지난달 22일 올림픽공원에서 산림청이 주최하고 산림조합중앙회가 주관한 '2005 산주와의 만남' 행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5ha 이상의 산을 소유하고 있는 산주 20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는 산림시책 소개, 유망 산림소득 품목 소개, 임업기술지도사업 소개, 우수 산림경영사례 발표 등의 공식행사가 있었다. 또 산주들을 대상으로 80여명의 임업경영 전문가들이 10개 분야 산림사업 상담 및 30개 분야 임업기술컨설팅이 있었다.서범석 기자 seo@woodkorea.co.kr
(주)쎄쩌베델프로덕트 http://www.setzer.co.kr쎄쩌의 사이트는 수년 전 한 번 리뷰한 적이 있다. 당시에 지적했던 사항은 아키텍처의 개선이 주된 것으로 사이트가 비교적 방대한 편인 쎄쩌의 경우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였다. 아울러 사이트의 초기에 대부분 홍역을 겪는 이미지의 문제가 있었다. 인터페이스의 통일성도 지적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해결되어 매우 멋진 사이트로 거듭난 쎄쩌의 웹사이트를 다시 만나게 돼 기쁘다.그러나 사이트는 늘 개선할 사항이 있는 법. 쎄쩌의 전체적인 구성은 매우 세련되고 체계적으로 변모했지만 쎄쩌베델프로덕트(주)와 쎄쩌코리아건설이라는 두 회사의 사이트를 합쳐서 제공하는 것 때문에 다소 사이트가 방만해보인다.메뉴 배열에 독창성
솔로몬이나 PNG의 나무도 이런 추세로 벌채해 가면 5~6년 후에는 인도네시아처럼 수출을 금지할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동남아 등 우리나라와 가까운 곳에서 수입되는 나무는 별로 없고 멀리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나무를 수입해야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나무를 수입하면 freight(선박운임) 때문에 국내시판가격이 적어도 才당(원목) 1,000원을 호가하게 될 것이다. 才당(원목) 600원 하는 나무를 주로 써 왔던 우리 목재업계는 그런 비싼 나무를 써야할지 말아야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것 같다. 1988년도에 브라질 원목을 수입하러 브라질 북서부에 있는 포트벨호(Port velho)라는 작은도시에 간 적이 있다. 따우아리(Tauari)라는 나무를
지난 6월2일 일산 한국국제전시장(KINTEX)에서 개막된 '2005 스마트홈 & 홈네트워크쇼'에서 한 관람객이 무선 단말기를 통해 홈네트워킹을 체험하고 있다.노진수 기자 jsnoh@woodkorea.co.kr
지난 6월1일 한국국제전시장에서 개막된 '2005 교육박람회'에서 김진표 교육부총리가 '목재교실 체험관'에 들러 국산낙엽송으로 제작된 책걸상을 살펴보고 있다. 노진수 기자 jsnoh@woodkorea.co.kr
최근 경기도 일산 한국국제전시장(KINTEX)에서 개막된 '2005 목공페스티벌'에 참가한 한 여성참가자가 목재 재단작업에 몰두해있다.노진수 기자 jsnoh@woodkorea.co.kr
합판업계에는 아직까지도 납득이 가지않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그것은 1969년 왜 대성목재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어 조흥은행 관리업체로 넘겨졌을까 하는 점이다.공장을 하나 더 짓기 위해서 차관도 얻어썼고, 은행돈도 많이 빌려썼으니 부실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69년이면 합판회사들이 한참 잘 될 때이다.1969년에 공화당 정부는 부실기업정리팀을 만들어 팀장에 장덕진 씨(후일 농림부장관)를 임명하여 대성목재를 부실기업으로 정리하고 당시 군에서 예편해 있던 황필주 씨를 사장으로 임명하여 대성목재를 운영하게끔 하였던 것이다.당시 합판업계에서는 대성목재 사장 전택보 씨가 공화당 정부에서 요구하는 정치자금을 거부했기 때문에 괘씸죄를 적용받았다는 얘기가 팽배해 있었다. 과연 그랬을까?그때의 정황으로 봐서
우드코리아http://www.veneer.co.kr우드코리아의 홈페이지가 깔끔하게 변신했다. 메뉴별로 기능을 적절히 배분한 것도 좋았고 메뉴마다 적당하게 컨텐츠를 배치해 어느 것 하나도 모자람이 없다.첫화면의 설계는 전략적이어야 한다첫화면은 간판이다. 첫화면은 사이트의 지도다. 이 말은 첫화면의 중요성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첫화면은 사이트의 성격을 한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디자인해야 하고 첫화면을 통해 사이트의 어느 곳이든 곧바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한동안 사이트의 첫화면을 동영상이나 플래시로 장식하면서 한껏 미적 감각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첫화면을 보다 기능적으로 디자인하는 추세가 두드러진다. 자질구레한 장식이나 불필요한 광고를 빼버리고 오로지 검색 그 자체에만 집중한 구글닷컴(g
1960년대 후반은 우리나라 원목개발업체들의 해외진출이 러시아워를 이뤘던 시기였다. 동화개발, 남방개발, 경남개발이 연달아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 동화개발은 발릭파판에, 남방개발은 반잘마신에, 경남개발은 타라칸에 각각 진출했다.당시는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업체에 취업하는 것을 상당한 긍지로 여길 때였다. 해외에 나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비록 그 하는 일이 밀림 속을 헤치고 다녀야하는 힘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나가서 근무한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이었다.그 무렵 석탄공사 과장으로 있던 최명행씨(작고, 서울농대 임학과 출신)는 남방개발의 과장으로 스카웃됐다. 석탄공사에서 익힌 항공써베이 기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남방개발에서도 항공써베이 임무를 다년간 성실히 수행해
70년대 당시 인도네시아도 국내선에 대해선 예약문화가 잘 되어 있지 않았는데다가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예약할 겨를이 없었을 때 공항으로 바로 나가서 비행기를 타려면 언제나 듣는 말이 있다. ‘노싯(No seat)’이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웨이팅 리스트에 명단을 올려놓고 간신히 비행기를 타서 주위를 살펴보면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있다.그래서 몇번 당해본 그 당시 주재원들은 그럴때 하는 비법(秘法)이 있다. 여권 속에 만 루피아(당시 한국돈 만원정도) 짜리 한장을 넣어서 ‘플리스(please)하면 금방 자리가 나온다. 당시 필자는 명함 100장을 들고 인도네시아 주요지역을 돌면서 shipper들에게 대성목재가 자카르타에 주재소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닐 때다. 반잘마신에 도착해서 한국 사람들이
아름마루 품평회
2005서울모터쇼에서 선보인 아큐라(일본 혼다의 미국 수출브랜드)의 최신 모델.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자동차에도 사람의 손길과 눈길이 닿는 곳곳에 목재가 자리잡고 있다.목재는 21세기에도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소재의 하나로 자리매김 할 것이란 게 전문자들의 공통된 견해다.노진수 기자 jsnoh@woodkorea.co.kr
시공 2년 정도 밖에 안된 목조주택의 데크 곳곳에 불량방부목 사용으로 인한 하자가 속출하고 있다.이러한 하자들은 비전문가에 의한 부실시공과 더불어 기준미달의 불량 방부목 등 불량자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목조건물이 난립하던 시절 우후죽순으로 세워진 이러한 '불량 목조주택'으로 인해 모처럼 되살나려는 목조주택 열기에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우려된다.한편 관련 전문가들은 이러한 하자에 대해 업계의 책임있는 자세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노진수 기자 jsnoh@woodkore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