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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나이 오십에 주(周)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갔다. 전쟁을 통해 중국통일을 꿈꾸던 선왕(宣王)에게 왕도정치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통해 중국통일을 꿈꾸던 선왕은 맹자를 재주 많은 사람으로 받아들였음에도 그의 정관에 대해서는 쉽게 의견일치를 볼 수 없었다.

인의(仁義)의 왕도정치를 주장하던 맹자는 군주가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한다면 백성도 또한 그 군주가 즐거운 것을 즐긴다고 임금을 설득했다.

전쟁을 통해 백성과 신하를 위태롭게 하고 이웃나라 제후들과 원수를 맺으려 하며 일방적인 무력으로 대국으로부터 중국통일을 얻어 내려는 임금의 무지를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빗대어 말했다.

즉 임금의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재난밖에는 얻을 것이 없다는 그의 말에 임금이 솔깃하자 맹자는 가슴에 품었던 왕도정치로 임금을 설득한다.

우리 조림정책의 역사는 일제말기 재탄생했다. 황토 빛 민둥산들이 50여년 후 푸르른 강산이 됐다. 성공적인 치산녹화정책이었다. 그런데 용도불명(用度不明)의 결과물로 평가받고 있다.

청(廳)은 불과 10여년 후면 대다수 조림목이 벌기령을 가득 메울 형편인데도 아직 쓸 곳, 팔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기업을 설득하려해도 쓸만한 재목(材木)을 찾을 수 없고, 찾는다 해도 벌채부터 운반, 이용까지의 과정이 만만치 않다고 투덜댄다.

설득과 이해를 위해서는 맹자와 같은 치밀한 계획과 전략이 요구된다. 팔고 싶으면, 왜 사야하는지 알려주고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지, 남들보다 손해는 보지 않을는지 사야할 사람에게 확신을 줘야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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