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무런 이유없이 어떤 형태를 띄는 것이 아니다.

외양은 결국 생각과 인식의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공간은 우리가 현재 생각하고 있거나, 잠재적으로 바라고 있는 모습으로 채워지게 된다.

제재소들이 밀집하고 있는 지역을 둘러보면, 제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업에 대하여 요즘 어떠한 생각과 인식을 가지고 있는 가를 가늠할 수 있다.

허물어진 담벼락, 먼지에 찌든 공장 안의 모습,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 공장마당 그리고 쓰레기 침출수처럼 흐르는 수피에 물든 붉은 빗물, 그리고 여기 저기 쌓여있는 쓰레기들….

바로 이러한 모습들이 현재 한국의 중소 제재소를 생각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려지는 연상들이다.  지금 제재업은 버려진 흉가처럼 흉물스럽게 인식되고 있다.

제재업은 과연 희망이 있는 것일까.

제재업이란 것이 과연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수 있을 만큼 경쟁력이 있는가.

우리는 이 업의 미래에 대하여 ‘그렇다’ 하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재업의 앞날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또 그 존재이유에 대하여 매우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한국의 제재업은 그 정체성이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제재업의 존재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부가가치 있는 제재목의 생산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제재업의 존재이유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상은 제재업이 제재목을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공산품의 원료를 공급하는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즉, 제재목을 생산 하면서 그 부산물인 화목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화목을 생산하기 위하여 제재목을 생산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 변화의 현실적 모습이 바로 대형 제재소의 출현이다.

그들의 주목표는 제재목이 아니라 화목이다.

그들의 낮은 제재목 가격은 값싼 화목을 원료로 사용하는 다른 공산품의 부가가치로 보전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합리적인 제재목 가격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오직 가격에만 의존하는 대량생산의 단선적 경쟁력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야만, 더 많은 부산물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소 제재소는 낮은 시장 가격을 보전 받을 곳이 없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지금 연상되는 제재소의 못난 몰골은 제재업의 존재이유에 대하여 혼란스러워 하는 중소 제재소의 현재와 미래 모습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변화하여야 하는 것에 대하여 방향이 상실된 것이다.

기업내부의 변화속도가 기업외부의 변화속도 보다 느릴 때, 기업은 망한다.

지금의 중소제재소는 변화의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발전을 위한 변화 자체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존재하여야 하는 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재업계의 비극이 될 수도 있고, 나아가서 목재업계 전체의 비극이 될 수도 있다.

대형 제재소의 변화는 제재업 그 자체를 위한 발전적 변화가 아니라, 다른 공산품을 위한 희생적 변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변화는 제재업이 하나의 기업으로 존재하기 위한 빛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틀림없이 다가올 다양한 목재 문화를 흡수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쉽고 부족한 그늘이기도 하다.

제재업에 과연 희망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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