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 중 인간과 가장 많은 접촉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중의 하나가 바로 도어일 것이다. 집 또는 방을 드나들면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곳이 바로 도어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목재도어를 PVC나 철제가 대체해 나갔다면 이제는 목재가 그 자리를 되찾을 차례 아닌가?
목재도어의 제자리 찾기에 매진하는 국내기업 중 해외에서 품질은 먼저 인정받은 목재도어회사, 리성창호를 찾았다.

Image_View리성창호는 메소나이트 스킨도어로 유명한 회사다.

스킨도어용 패널 전문생산회사인 메소나이트는 90년대초 당시만해도 구멍가게 수준이었던 리성창호를 메소나이트 생산지정업체로 선정했다.

그들이 중요시 한 것 무엇보다 품질이었다. 리성창호는 별다른 도어 품질 시험 기구도 없이 철저히 정석대로만 도어를 제작했다. 시험이라고 해봤자 고작 도어를 사람이 수차례 열었다 닫았다하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메소나이트는 리성창호의 생산공장을 직접 방문하며 어떻게 이런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고 한다.

메소나이트의 선택은 적중했다. 리성창호는 국내 굴지의 창호제작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급성장을 이뤘다. 자본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영업사원도 두지 않았다. 리성의 성공은 오직 외골수같은 "고품질 주의"에 있었다. 현재 도어 시판업체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전국적으로 거래처만 1,200여개에 달한다.

리성창호의 성공 배경 중 다른 하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에 먼저 도전했다는 것이다. 리모델링이라는 의미가 채 정립되기 전부터 리모델링에 대비한 도어 개발에 매진해 왔다. 요즘 베란다나 주방과 거실 사이에 또는 붙박이장에 활용되는 접이식 도어가 그 대표작이다. 국내 건설사 중 리모델링을 가장 먼저 시작한 쌍용건설과는 리모델링이라는 매개체로 끈끈한 유대를 자랑하고 있다.

얼마전 리성은 공장을 이전하고 생산설비를 확충했다. 이로 인해 일일 300장정도 생산하던 도어생산량이 500장으로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드보드 이색도장공법 특허, 목재메탈 혼합도어와 접이문 의장등록 등 다양한 제품 개발에 매진해온 리성은 국산재의 나이테가 보이는 가로단면을 상감한 나이테 상감도어로 국산 소경재의 활용에도 앞장서고 있다

Image_View

Image_View

유현희 기자 hyunhee@woodkorea.co.kr

 

리성창호 이영석 대표

"두려움 가지면 실패한다"

Image_View리성창호 이영석 대표의 이력은 남다르다.

66년 대성목재에 생산직으로 근무한 것이 목재와의 인연이었지만 2년만에 대우중공업에 들어가 기계 관련 업무를 해왔다. 그러던 중 87년 삼익훼미리도어의 대리점을 하면서 놓았던 목재와의 인연을 다시 맺었다. 대리점 개설 첫해 전국 판매 1위를 달성했던 이 사장은 이후 유통의 한계를 느껴 직접 생산을 결심했다. 이렇게 리성창호는 89년 문을 열었다.

리성은 상호가 독특하다. 주변 사람들은 이 사장에게 북한이 고향이냐는 질문을 자주한다.

"북한이 고향이라니요? 제 할아버지가 완고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이씨 성은 원래 "리"로 쓰는 것이 옳다고 강조해 왔죠. 상호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따른 결과일 뿐입니다."

아이엠에프는 목재산업 종사자 누구에게나 위기였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나이 쉰다섯에 부도를 맞았다. 차도 없고 창고에 달랑 분짝 30개만 남았었다. 주변에서는 "그 나이에 부도 맞으면 재기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6개월동안 30짝의 문짝을 판매하면서 재기의 기반을 다졌다.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 성공이었다. 항상 "두려움을 가지면 실패한다"는 신념을 가진 그에게 나이 쉰다섯의 부도는 포기보다는 오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그는 경영방식도 남다르다. 생산현장에서의 주인은 직원임을 강조하는 그의 회사에는 퇴근 시간이 없다. 생산 목표량을 채우면 5시에도 퇴근을 하고 10시까지 일하기도 한단다. 직원들이 모두 "내회사"라는 생각을 해주기 때문에 이사장은 뿌듯함을 느낀다고.

목재업계에 젊은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