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나무와 함께한 반세기 공예 인생

차기수 명장은 목공예 경력만 반세기가 넘는 51년이다. 대목이었던 할아버지와 역시 목공이었던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던 그였기에, 목공예의 길을 시작했던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업경영자의 일선에서 물러나 3대에 걸쳐 전통을 살리는 작품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차기수 명장(2001-8)을 만나보았다.

 

 


3대를 이어온 목공예의 길
Image_View"목공이란 것이 기술과 인내를 가장 필요로 하는데, 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 모든걸 타고난 것 같다"며, 차기수 명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시작되는 어렴풋한 기억들을 더듬어 본다.
1937년 경남 거창에서 삼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일어난 작은 사고로 지금껏 70여 년 가까이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 생계 유지하는 일도 힘겨웠던 때였기에 탈골과 같은 경상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 세월을 넘겼었다. 혹자는 그를 소아마비 환자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특별한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공부를 통한 경쟁보다는 남들과 차별된 자신만의 기술로 경쟁하는 것이 그의 미래를 보장받을 것 같아 목공예가의 길을 선택했고, 지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기능공 출신의 최고경영자
Image_View대구시 소재의 삼영가구에서 목공예 담당자로 10년을 보내던 중, 부모님의 권유로 지금껏 반평생을 한결같은 희생으로 지켜주고 있는 아내를 맞이하게 됐다.
목공예가로써의 커다란 포부를 안고 서울에 입성한 것은 결혼무렵인 1959년이었다. 당시에는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에도 목공상이 제법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곳을 거쳐 68년까지 세화가구의 공장장을 맡으면서 가구제작과 디자인 업무를 담당했다.
공예가가 아닌 한 기업의 간부사원으로서 자리매김을 하던 중에, 68년 중반에는 107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창신가구공업사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서울에 상경한 뒤 10년만의 성공이었다.
경영자로서의 아이템의 개발뿐만 아니라, 직원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 위치에서 최고의 기술자가 될 수 있도록 늘 아낌없는 배려를 해 주었다. 당시 세화가구시절 직장동료의 부탁을 받아 요한보스코 직원훈련원 졸업생들을 받아들여, 기술의 연마와 함께 사회적응훈련을 시키는 등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이 창신가구공업사 시절 전직원과 함께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주최하는 한마음 연수교육과정을 이수했던 일이다. 이 교육과정은 당시 우리나라 2만7,000여개의 중소기업중 우선순위에 따라 교육이수를 할 수 있었다. 대표자와 함께 부서별 생산직, 관리직 등 107명 전직원과 함께 이 과정의 5번째 기수로 선정된 일은 기업가로서의 성공을 인정받은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공예가는 미련 아닌 운명
Image_View"그만둘 때는 최대의 전성기에 떠나라"는 옛 성현의 말이 있다.
차기수 명장은 기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공예가로서의 부족함이 가득했다. 전통공예를 하는일이 아무리 배고프고 힘겨운 일이라 해도 애초부터 그의 꿈이 그것이었기에 늦은 감이 있었어도 과감히 도전을 했다. 1986년에 비로소 경영하던 창신가구공업사를 정리하고는 공예가로써 작품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조용한 작업실을 찾아 자리를 옮기고 현재 파주시 월롱면에 차림공방의 문을 열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초창기의 가구에서부터 장신구함, 필통, 좌경 등의 생활소품으로 변화한다. 소재는 주로 느티나무와 흑단, 가링 등이다. 모든 작품에는 전통을 고수하기 보다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현대화된 이미지가 투영돼 있다. 이태리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던 무늬목 상감을 우리 제품에 활용하기 위해 조각가 박진환 씨와 함께 국산화에 노력해 성공한 일은 지금껏 수입대체 효과로써 산업체의 아이템으로 활용되고 있는 업적이다.
Image_View이 밖에도 卍, 亞, 龜 등 각종의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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