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우리시대의 유물을 남기는 사람

경기도 이천에 고향을 둔 손덕균(목공예 명장 91-39호)씨가 서울, 인천을 거쳐 강화도 양도면에 자리잡은 해가 지난 94년. 어느 새 10년 전의 일이다.
그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자리보다 유물연구(강화반닫이 연구소 운영)와 작품세계에 애착을 갖는 시간이 더 길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항상 곁에서 묵묵히 지켜주던 아내가 있어 오늘의 자신이 있는 것"이라며 아내의 큰 자리를 자랑한다.
손씨는 우리 생활속의 목가구 연구를 중점하고 있다. 기성가구의 모방과 하자발생 문제를 비교할 때 기능성과 디자인에서 결코 뒤지지 않을 우리 전통가구의 선점을 기대하며 유물연구에 몰두하고 있고 완성된 연구작들은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 각국에 전시돼 소중한 우리 문화 전달에 일익을 담당하고있다.

 

끊임없는 연구와 수양의 길
Image_View목공예의 길을 처음 접한 것은 15세 때인 66년 5월. 주위의 권고와 어린 호기심으로 들어선 소목장의 길인데, 어느덧 30여년의 세월을 훌쩍 넘기고 있다.
목공예의 기술을 처음 가르쳐준 스승은 고 김명남 선생이다. 74년 8월4일 작고하신 선생은 5일전인 7월31일 손씨를 부르시더니, 당신의 "손떼 묻은 연장과 모든 것을 건네주겠노라"며 유언을 남기셨다고 한다. 이일이 손씨에게는 목공예가로의 길에 열정을 쏟게되는 결정적인 시발점이 됐다.
이후 안암동의 고 김태희 선생에게서 도안을 공부했다. 소반하나를 보아도 테두리의 선, 다리의 내각 하나 하나를 연구하고 그림으로 옮겨도 보고 지우고 다시 채우기를 수 차례 반복해야 그 중 한가지를 소중한 작품으로 얻어낼 수 있는 외로운 과정이다. 작품 제작 중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데로 만들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이전의 교육들이 기술 습득에 준했다면 현재 정양모(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선생에게 배우는 도안에 대한 일들은 참된 한국의 맛을 찾는 과정인 것이다. 도예가로 이미 명성을 남긴 선생은 이미 74년도에 우리 전통목가구를 집대성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도안으로 남기는 것을 다 작품으로 남기지는 못한다 해도 기록으로 남을 때 훗날 누구든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이고, 손가는 데로가 아니라 배열과 크기를 규정해 대중적이고 보편화시키기 위함이다.
손씨는 이 일을 "미친짓"이라 스스로 평한다. 야박한 말이지만, 그렇게 연구에 미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작품을 도면에 옮겨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에의 도전
Image_View"뛰어난 기술과 지혜를 가지고 옛것을 재현하는 일은 단지 모방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그. 여기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두철미한 모방이 아니라면, 기술자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이 담겨있다. 손씨가 작품 제작에 남다른 정성과 열정을 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1년 목재상감을 위해 을지로에 위치한 국제목재에 3mm 무늬목을 처음 의뢰했던 사람이 손씨다. 이후 72년 이를 이용한 작품은 대회(동아전)에 입선하게 된다. 한참 뒤 77년에는 목가구에 자수를 접목시켜 보았더니, 사람들 하는 소리가 가지각색이다. 아무래도 비판의 눈길이 많았는데, 이후 80년대에 다른사람들에 다시 시도돼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단다.
이후 은과 무른 돌을 이용한 상감도 시도했었다. 은은 나무가 늘거나 줄 때 접착력이 떨어지지만, 숨을 쉬는 무른돌은 잘 어울려 작품으로서 가능했다. 그의 도전정신은 비판과 한숨 섞인 얘기는 곧 잘 들었지만, 도전하는 마음이 있기에 오늘의 위치에 이르는 발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작품 탄생을 위한 정성
Image_View전통가구를 제작하는 일이므로 될 수 있는 한 우리 목재를 사용한다. 구하기 힘든 느티나무나 뽕나무, 돌베나무, 참죽나무, 먹감나무 같은 것은 오래된 사찰이나 가옥을 헐어낼 때 대들보, 기둥재, 계단재 등을 미리 확보하고 일부는 구입한다. 이따금 마을 분들이 귀한 나무를 구해 주기도 한다.
작업실 안에는 손떼 묻은 연장이 선반 가득하다.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반세기를 훨씬 넘은 것도 있다. 건조에도 남다른 정성을 다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