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칠 공예부터 문화재 수리까지 만능 재주꾼
옻칠 공예가 권영진

14세의 나이로 홀홀단신 고향 원주를 떠나 서울로 왔을때는 단지 무엇이든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자 하는 목표 뿐이었다. 우연히 나전칠기공장에 들어갔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시작했던 칠공예였지만, 이제 키워왔던 선생의 재주를 후학에게 전하려 하지만 더 이상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단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제일의 칠공예 터전인 원주에 고향을 두고도 이곳 경기 남양주에서만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권영진 선생.
작은 오두막이라도 지어 고향인 원주에서 자랑스런 칠공예의 명맥을 지키고 싶다는 그를 만나보았다.

 

일취월장의 보람
권씨가 답십리의 나전칠기 공장에서 기술을 습득할 70년 초만 해도 칠공예 제품의 인기는 절정기를 달리고 있었다.
화려한 자개와 차분한 옻칠이 주는 느낌의 장롱은 부잣집 혼수로서 빼놓을수 없는 목록 1호로 꼽혔었고 여인네들은 지나가다가도 그 화려함에 발길이 멈췄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카슈라는 화학칠재료를 사용하면서부터 진정한 칠공예가 아닌 이윤추구의 사업으로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많은 갈등을 겪었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자연그대로의 옻칠과 화확재료인 카슈의 차이를 설명도 해보고 설득도 해보았지만, 결국 가격경쟁에 이기지 못하고 전통의 옻칠은 대중속에서 사장되기 시작했다.
이런 아픔들이 권씨에게는 오히려 전통을 보존해야하는 소중한 의무감과 오기로 다가왔고 이후로 지금껏 칠공예의 기술을 터득하는 배경이 됐다고.


현실에 남겨진 전통
사람들은 전통 옻칠이 된 제품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비싸다고 얘기한다.
그도 그럴것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원주의 생옻은 백 여만원을 호가해 주요 기능대회 및 전시회에 출품될 작품이나 문화재 복원 등 전통의 깊은 멋을 소중히 살려낼 때 사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며 보통은 중국에서 수입된 중저가의 옻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씨는 전통 옻칠의 미래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지고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천연재료인 옻의 효과가 크게 부각 됨에따라 이제는 화학재료인 카슈가 사양길에 오를 것이며 이보다는 천연의 상태인 옻에 대한 수요가 늘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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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필수품
Image_View"옻칠한 제품이 비싼 것은 재료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칠공예를 하면서도 옻의 효능이 얼마나 좋은지 실험을 했지요. 지난 여름날 옻칠된 공기에 밥을 채워 햇볕에 내놓았더니, 삼일 밤낮이 가도 밥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놀랄만한 효능 아닌가요?"
권씨의 작품 중에는 전통과 적절히 접목되어 참으로 현대적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것들이 다분하다.
흥부놀부전을 연상시키는 기능성 인테리어 소품에서부터 찻잔에 새겨지는 꽃문양과 반딧불이를 만화적으로 재현해 놓은 쟁반, 섬세함이 돋보이는 오절함 등 권씨의 작품에서는 자개와 옻칠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함과 소박함이 적당한 운치로 다가온다.
가장 주목됐던 작품은 옻칠이된 사진틀부착형 납골함이었다. 모친의 영정사진까지 꺼내 놓으며 기능성을 설명하던 권씨는 "이렇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전통은 얼마든지 현실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해를 도와주기도 했다.


만학의 길
Image_View권씨에게 뒤늦게 전통나전칠기를 사사한 스승은 중요무형문화재 113호인 정수하 선생이다. 만학의 길에서 시작된 배움의 길은 다른이보다 몇 배의 노력을 요해야 하는 것이 스승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작년 한 해 동안에만 경기도내 기능대회, 전국 대회, 원주에서 열렸던 칠 공모전 등에 모두 상위권에서 입상을 했을 정도로 각종 대회에는 빠짐없이 참석했었다.
"진정한 칠공예가가 되기 위한 준비단계에 있을 뿐입니다.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죠. 대회를 준비하면서 같은 작품을 여러차례 반복하게 되면 어느새 손에 익숙해짐을 느낍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칠공예가로서 자개를 다뤄야 하는 부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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