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_View삼대를 이어온 전통연 제작
서울시 무형문화재 지연장 이수자 노성규

예로부터 소원을 빌고 액운을 날려버리는 풍속으로 행해진 연날리기. 연은 세계적으로 분포된 문화유산인데 우리나라는 방패연이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다.
일제시대 전선 부근에서 연을 날리지 못하도록 형벌을 가하면서 명맥이 끊길 위기를 겪기도 한 연날리기는 한 집안에 의해 재건됐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지연장 노유상 옹(98)과 이수자인 노성규, 그리고 지금은 군에 있는 성규씨의 아들 순씨까지 3대에 이어 전통연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
연을 가장 많이 날린다는 설날을 며칠 앞둔 날, 전통연 제작 현장을 찾았다.

 

아버지와 연, 그리고 나
Image_View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연 제작을 보아온 그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인 1971년 연만들기 장학생으로 입문했다.
61년 ‘백상배 연날리기 대회’에서 여덟 살의 나이로 유년부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미 연과의 끈질긴 인연은
그 자신도 모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연을 만드시고 날이 좋을 때는 연을 날리곤 했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에 있는 아버지는 늘 연과 함께였다. 어느새 100세를 바라볼 만큼 연세가 드신 아버지는 지금도 하루에 한 두개의 연을 제작하곤 한단다.
아버지와 그의 연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93년에는 ‘한국민속연보존회’를 설립했고 국제적인 연날리기
행사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우리 연의 우수성을 알려왔다.


일제 탄압 겪고 부활한 전통연
우리 고유의 풍속인 연날리기는 1911년 일제에 의해 중단되는 시련을 겪었다. 연이 전선에 걸려 통신에 방해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는 표면적인 것이었다. 방패연은 가로, 세로의 비율이 태극문양을 연상시키며 실제로 태극문양을 넣기도 한다. 일제의 금지는 민족정신 고취를 금지하고자 하는 데 그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제1회 백상배 연날리기 대회를 열면서 노유상 옹은 대회의 책임을 맡게 됐다.
당시 군인 신분이었던 노유상 옹은 바람이 좋은 날이면 늘 연을 날렸고 행사를 준비하던 시청직원에게 동네 사람들이 그를 소개하면서 대회의 책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백상배 연날리기 대회를 통해 연날리기와 제작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연에 대한 열정과 사랑
Image_View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난 노옹은 장연보통학교 시절 스승 박건석에게 연제작기법 및 연날리기를 사사받았다. 징용을 피해 베이징 상공회에서 근무하던 노옹은 서안에 광복군이 설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청년 10여명을 서안으로 보내려다가 일본에 발각돼 총살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50년 마흔 여섯에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노옹은 전쟁 와중에도 틈틈이 연을 띄울 정도로 연에 대한 열정이 깊었다.
그는 연에 대한 애정도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다. 연을 알리기 위해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끊임없이 연 창작에 매진하는 것은 물론 박물관과 각종 문화센터를 통해 연 제작을 보급하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문화유산
목판화를 시작한 초창기 그가 사용한 재료는 마티카였다. 가공이 쉽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전시된 판각은 대부분 은행나무다. 돌배나무도 일부 사용하고 있지만 먹물로 찍어내는 그의 작품 특성에는 은행나무만한 것이 없다고. 은행나무는 물을 머금는 성질이 있어 종이에 흘러내리는 문제점이 없어 수성먹판화에는 적격이라고 한다.


본질을 귀하게 여겨야
Image_View연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 보이나 문헌에서는 김유신이 진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무리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띄운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전통연은 연의 형태와 문양에 따라 종류가 나뉘는데 형태는 방태연과 가오리연으로 구분되며 문양에 따라서는 100여종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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