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실업 김광채 사장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동업 사장인 김낙기 사장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거 좋지요”하며 쾌히 김낙기 사장을 바꿔준다. 김낙기 사장은 선뜻, “제가 뭐 할말이 있어야 지요”하며 겸손해 한다.
2월6일 기자가 김낙기 사장을 찾아 삼산실업 정문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 한대가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합판을 부리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김낙기 사장과 김광채 사장이 반갑게 기자를 맞이한다. 과거 대성목재에 같이 근무했던 관계이기 때문이다.

 

Image_View사업을 시작한 때가 언제인가요? 그때 개업식에 참석했었는데 ….
김 사장이 삼산실업의 창업초기의 아득한 기억을 떠올린다.
“87년 10월입니다. 그때 연안부두 대한창고 옆에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얻어 여직원 한명만 데리고 시작했었지요. 당시는 이런 팩스기도 별로 없었을 때였습니다”하며 옆에 있는 신형팩스기를 가리킨다.
사무실도 커졌고, 직원도 많아졌고, 지금 사무실로 쓰고 있는 부지도 이제는 자기 땅이다. 87년부터 사업을 시작했다니 18년 동안 동업을 해온 셈이다.


대성목재에서는 얼마동안 근무를 하셨나요?
“73년에 입사해서 87년까지 근무했으니 14년 근무했습니다. 처음에 입사해서 월미공장 합판과에서 일을 했습니다.”
김 사장은 학교선배인 김휘경씨가 만석공장 합판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합판회사에서는 합판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배울 것이 많다고 조언해 줘 자청해서 합판과를 선택했었다. 합판과에 한 3년 근무할 때였는데 생산관리과에 자리가 하나 비는 바람에 생산관리과로 가서 근무도 했고, 그 후 영업부에서도 근무를 했었는데, 86년부터는 합판수출이 전연 되지 않자 영업부를 축소했었다. 그때 영업부가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겨와 그 후 개발과에도 근무를 했단다.
김 사장은 대성목재 근무 시절을 사업가로서의 성공의 밑거름이 된 중요한 시기였다며 추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김낙기 사장과 기자는 한참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다.

김광채 사장과 동업을 꿈꾸게 된 동기는?
김광채 사장과는 73년 입사동기였고,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써온 룸메이트였다고 밝힌다.
“그때부터 서로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지요. 개발과에 있을 때 구자필씨라고 아실 겁니다. 그분이 보온재(석면)장사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대성목재를 그만 두고 보온재사업을 했었는데, 그분은 투자하기로 한 돈을 영 넣지 않는 거에요. 거의 퇴직금을 다 까먹고 그 사업을 그만뒀지요. 그러고 나니 뭐 할게 있어야지요.”
그 후 입사동기인 김광채씨를 찾아가 무작정 매달렸단다. 그때 뜻이 맞아 지금까지 함께 사업을 하게 됐다고 넌지시 웃음 짓는다.


처음 사업으로 시작한 아이템이 제재목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어떤지요?
삼산실업은 제재목 수입을 통해 사업을 시작했었다. “저는 제재목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어야지요. 김광채 사장이 문령실업에 있으면서 동남아시아를 자주 드나들었으니까 말레이시아의 제재목 수입을 맡고, 저는 판매를 하는 것으로 시작됐지요. 잘 아시겠지만, 원목과에 있던 임흥순씨도 처음에는 같이 사업을 하는 것으로 돼있었어요. 그래서 회사이름도 「三山」이라고 짓게 되었고요.”
하지만, 결국 임흥순씨는 조인에서 빠져 삼산의 멤버는 셋이 아닌, 둘이 됐다.


임학에 대한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서울 양정고등학교 출신인 김사장의 고향은 충북 진천이다. 중
학교 때 서울로 상경한 김사장의 고향 진천에는 부모님이 살고 계시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임학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김사장은, “주위에 어느 학교, 어느 과를 지망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도 없고 해서, 임의대로 고대 임학과를 결정하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담임선생님도 아무 말씀 없이 승낙해주셔서 임학과를 가게 되었지요” 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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