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색다른 삶이 어울리지 않을 듯 하면서도 어울리는 사람, 사업, 교육, 봉사, 협회, 예술생활 등 너무도 많은 일들을 해온 31년생 남자. 교사에서 시작해서 건설회사, 목재회사를 창업하여 문화재보수 및 복원에 뜻을 두고 전념해 온 지 41년이 지난 지금. 우리 것의 소중함이 남다른 사람의 인생여정을 들어 보았다.

 

Image_View남도의 전통건축용 소재 생산의 메카
금남목재에 들어서는 순간 여느 제재소와 다를 바 없는 제재기와 지게차, 톱밥사이로와 원목저장고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 깍고 다듬고 하는 목수가 눈에 띠고 어딘가에 쓰일 가구재가 쌓여 있었다. 사장실을 들어가는 2층 입구 한편에는 경축 ISO 9002 인증획득이라는 붉은 색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아주 공들여 제작된 전통한옥 건축물 미니어처와 가구연결부위 샘플이 놓여 있는 전시장이 있었다. 회사가 전통재에 쏟는 애착을 엿볼 수 있었다.


교사에서 건설회사 전무이사로
58년 광주사법대학을 졸업하고 62년 화순초등학교 교사에 부임하면서 32세인 그는 교육현장에 발을 내닿는다. 그는 4년 6개월간의 교직생활을 청산하고 금광기업 고재철회장과 동업 형식으로 전무이사의 명함을 갖고 평생직업이 될 건축사업과의 인연을 맺는다. 67년 건설회사에 본격적인 건축 일을 하면서 관계를 갖게 된 전통건축소재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2차 오일쇼크가 난 다음해 80년 지금의 금남목재를 설립했다. 그의 형은 문화재 계통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설립 때부터 오랜 기간 동안 파트너로써 성장해 왔다.


전통건축용재에 대한 관심
전통건축용자재생산을 위한 금남목재를 설립할 당시 미송이나 나왕을 수입해서 제재사업을 해오던 제재업체가 채산성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안했을 때인데 전통건축용소재공급은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완벽하게 전통용 목재만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일반제재목생산을 병행하는 방식을 썼는데 지금은 85% 이상을 전통건축재생산을 한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국내에서 상당히 큰 규모의 전통재 취급업체로 발돋움 했고 지금은 연간 매출 40억원에 달하는 회사로 발전했다. 양적 생산을 중요시 하지 않고 양은 적어도 부가가치가 큰 사업의 선택이 지금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콘크리트 건축과 목조건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이가 있으며, 목조건축은 환경친화적이고 인간에 가장 친근한 건축”이라며 목조건축예찬론을 펴는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우리토양에서 자란 목재로 집을 지었을 때 가장 알맞은 건축이 된다“는 신념 때문에 국내의 임업이 반드시 성공해서 양질의 목재를 공급해야 한다고 걱정이 많다.


전통목조건축도 과학이 필요
그는 전통목조건축의 복원이나 시공에 있어서 목재의 처리는 매우 중요한데 실제 현장에서는 이를 무시하기 쉽다며 걱정한다. 전문서적도 턱없이 부족하고, 문화재용 목재의 방역이나 건조처리가 미흡하고 수종의 선택도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현재 금남목재는 전통건축용 소재를 본격 생산하고 있으나 빠른 시일 안에 시공전문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했다. 전통건축용 목재생산에서부터 시공까지 보다 과학적 고증을 통해서 그리고 과학적 처리와 이용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실현하고자 한다.


다재다능하면서 사회봉사의무를 다하는 사람
그는 전남태권도협회 회장을 맡은 만큼 무예에 능했고, 광주지역 일요화가 회장을 맡을 만큼 서양화에 대해 조예가 깊었고, 청소년선도관련 학원교육에도 열정이 대단했다. 각종 협회와 법조관련위원을 통하여 사회봉사의 길에도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 다재다능한 사람은 이분을 두고 하는 말이라 느낌이 들 정도였다. 돈은 벌기 쉬울지 몰라도 사회 봉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에게서 봉사의 정신이 무엇인지 배워봄직 하다.


이 분야를 떠나지 않을 것
전통건축에 대한 한 기업의 철학은 돈 벌이 이상의 가치를 염두 해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이러한 가치는 문화진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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