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는 100년이상 가업을 이어가는 전통있는 목재회사들이 많다.
참 부럽고도 뿌듯한 일이다. 국내에도 드물지만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사의 맥을 이어가는 아들들이 있다. 국내 특수목의 선구자인 유성목재의 소수호 사장이 그렇다. 아버지 고 소재경 씨의 뒤를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유성목재 소 사장을 만나보자.

 

Image_View가업을 잇게 된 동기는
아버님이 워낙 목재업계에 유명한 분이셨다. 70년대 특수목 분야를 개척하셨는데 새로운 수종들을 들여와 상품화시키는 역할을 하셨다. 특수목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신 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이 나는 정작 목재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공대를 졸업하고 엔지니어가 되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게 되시면서 가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79년부터 목재일을 시작해 벌써 2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했는데
처음 1년동안은 방황을 많이 했다. 어쩔 수 없이 왔으니까 의지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많이 했다. 하지만 더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기본부터 배우기로 결심하고 현장일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직접 제재기를 돌리고 막걸리도 마셔가면서 공장직원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영업을 시작하면서 점차 목재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면을 보는데는 엔지니어적인 감각이 큰 도움이 됐다.


가장 흥미있는 일은
역시 영업이다.
영업으로 일을 시작해서 더욱 애착이 강하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 내 물건을 판다는 것이 막연하지만 제품을 팔았을 때의 성취감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직원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을 먼저 팔아야 신뢰가 생기고 제품은 그 다음에 팔리는 거라고, 그렇게 맺어진 관계는 오래간다’고 말이다.
20년전 처음 영업을 시작할 때 거래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나의 고객이며 이제는 서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안다. 무조건 물건만 많이 파는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목재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영업을 하면서 건축현장을 많이 경험했는데 건축주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떤 재료를 선택하느냐’이다. 목재에 대한 미학적, 기능적인 부분을 건축주에게 설명해줄 때가 가장 뿌듯하다. 현장에서 가장 속상한 일이 있다면 어렵게 만들어진 제품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해 손상이 되는 경우다. 이러한 일로 참 많이 싸웠다. 제품이 훼손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가 없다.


경영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95년 인천공장으로 내려와 보니 이미 목재업체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난 상당히 뒤쳐져 있었고 당시 목재경기가 하향곡선을 타기 시작한 시기라 어려움은 더했다.
더군다나 98년 대표이사로 취임하던 때는 아이엠에프 시절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직접 수입을 하지 않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환차손은 크게 입지 않았다.


직접 수입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각자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 경제적인 법이다. 수입은 전문수입상이 하면 된다. 마진이야 좀 적겠지만 질적인 부분은 충족시켜줄 수 있다.
직수입을 자제했기 때문에 아이엠에프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수입을 하지 않는 대신 선별작업을 확실히 하기 때문에 ‘유성이 보고 갔다면 좋은 건 다 빼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가격은 좀 비싸도 그만큼 질적으로 보상해주는 영업정책을 쓰고 있다.


경영의 애로사항이 있다면
“유성은 비싸지만 품질은 최고다”라는 이미지는 굳어진지 오래다. 아버지때부터 큰 마진은 포기하고 상품의 질을 중요시하는 영업방법을 고수해왔기 때문에 좀더 비싸게 값을 치르고 좋은 물건을 선별해가는 요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근래들어 유통질서가 와해되면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손해보는 상황이다. 가격은 일반적인 가격에 질만을 맞추어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다. 유성하면 품질좋기로 유명한데 왜 이렇게 됐냐는 소리를 듣기 일쑤다.
소비자의 요구를 100%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


목재업계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유통질서의 와해가 가장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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