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것이다’‘내것이 아니다’라는 마인드 차이에 따라 엄청나게 상반된 결과를 초래한다는데…….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은 주식을 실질화하여 직원들과 회사의 공동주인이 되어 기업을 운영해온 일이라는 풍산목재 유승봉 회장의 다음 계획은 국내에 DIY(Do it yourself)를 보편화시키는 일이다.

 

Image_View전공과 다른 목재업에 종사한 이유는
장남이었기에 축산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축산을 전공했지만 한국무늬목(현 한국목재)의 최득수 회장을 만나면서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70년대 특수목의 대부였던 최 회장 밑에서 5년을 일하면서 내 평생의 업이 결정됐다. 난 그분에게 엄청난 무형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독립해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그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살아왔다.


나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30년이 넘는 세월을 목재일만 했다면 남다른 애정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벌써 다른일을 했어도 몇번은 했을 시간이 아닌가.
나무는 사람을 순하게 만든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아름드리 나무를 보면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점점 소재를 닮아가는 것 같다. 철과 콘크리트와는 다른 묘한 매력이 지금껏 나를 이끌었다.


가장 절망했던 순간은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의 팔이 절단된 일이 있었다. 접합수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정신적, 경제적 손실이 엄청났다. 경희의료원을 5년동안 드나들면서 제조일에 부담을 느끼고 유통으로 전환키로 마음먹고 81년 송파에 ‘풍산무늬목재공업사’라는 건자재상을 시작했다. 한창 송파가 개발붐이 일어 장사가 무척 잘 됐다. 그때만큼 재미를 보던 때도 없었다.


직원들과 회사를 공동운영했다던데
지금껏 한 일중 가장 잘했다고 자부하는 것이 바로 주식을 실질화시켜 직원들과 공동투자해 회사를 운영한 것이다. 직원이 같이 회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투자가 있어야 했다.
당시 직원들에게 아파트 한채씩은 마련하도록 도와줬기 때문에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회사에 투자토록 했다. 내 지분은 51%, 나머지 직원들이 49%를 나눠갖고 새로이 풍산종합목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내것’이라는 마인드는 여기서 실력을 발휘했다. 각자가 사장처럼 일을 하니까 밤낮이 없었고 당시 20억원이나 되던 외상값을 6개월만에 13억원을 회수해 대출받은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나 혼자 사장일때는 있을 수 없던 일이었다.
지금도 내 지분의 10%는 직원몫으로 떼놓고 있다.
‘내것’이라는 마인드가 이뤄낸 신화를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풍산목재는 어떤 회사인지
풍산이라는 의미는 ‘풍부한 산림’이라는 뜻이다. 나무를 베었으면 다시 심어야 마땅하다. 우리의 산림은 경제림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재 3만그루 정도의 나무를 심었다. 앞으로도 계속 나무를 심을 계획이다.
현재 안산 시화공단에 있는 본사에서는 제재를 주로 하는데 뉴송과 미송, 스프러스, 각종 특수목을 취급하며 수입합판과 한솔대리점도 운영하고 있으며 성남에 판매전시장을 가지고 있다. 연 80억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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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합판의 계열사가 많은데
목재업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건설때문에 목재업계가 얼마나 큰 피해를 봤는가 말이다.
목재업계는 경영이나 회계에 너무 약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난 빈틈이 없다. 돈을 못 받은 경우 회장인 내가 직접 “사장님이 돈을 줘야 체불임금을 받습니다”라고 쓴 프래카드를 붙인 차를 몰고 나가 돈을 줄 때까지 마이크로 떠들어 댄다.
요강을 들고 들어가 “돈 줄때까지는 당신과 나 밖으로 못나간다”며 윽박지르기도 하고 차 앞에서 누워서 오기를 부리기도 한다. 오죽하면 풍산 돈 떼먹으면 징그럽다며 현금 주고 사간다.
우리는 공단업체들을 제외하고는 외상장부도 없다. 외상은 사라져야 한다. 있는 범위 내에서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 공존할 수 있다.


목재업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회사의 존속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위기가 오기 전에 핵심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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