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세계적인 인공림인 흑림을 본 충격이 지금껏 임업인생의 방향키가 되어주고 있다는 산림조합중앙회 박경 개발상무는 사유림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협업경영뿐이라고 말한다.
3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임업에만 혼신해온 그의 임업인생이 궁금하다.

 

Image_View임업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계기는
마냥 숲이 좋아서 임학을 전공한 것이 평생의 일이 됐다. 60년대 황폐한 숲을 보면서 일생을 걸고 복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독일로 연수를 갔을 때 임업에 대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에서 가장 조림이 잘 되어있다는 흑림을 보면서 우리 임업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간 어떠한 일들은 했는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곳은 유엔 산하 한국산림조사 및 개발사업기구였다. 사방사업이 한창일 무렵 조림감독관의 역할을 했다. 인력은 적고 심어야 할 나무는 넘쳐나 구덩이에 나무를 적당히 뭍어버리는 일들이 허다했다.
독일에서 한국의 임업을 지원하게 되면서 한독산림경영사업기구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됐다. 울주군에 시범적으로 4개의 사유림 협업체를 조직하고 육림을 시작했다.
산림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가 전혀 안돼있어 임업이 발전하기 힘든 상황에서 공동으로 조림, 판매하는 협영경영체제만큼 효과적인 사업은 없다고 판단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해나갔다.


협업경영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던데
협업경영을 실시했던 울주군 두서면 마을주민들과 같이 일하고 먹고 자면서 하다못해 어떤 집에 숟가락이 몇개 있는지 조차 알 정도였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혼신의 힘을 다했었다. 그곳 언양천주교회에서 활동하면서 ‘대건회’를 조직하여 대출이 어려운 마을주민들을 위해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했는데 현재는 250억 규모로 성장해 지역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독일과 공동으로 개발한 프로젝트인 협업경영이 산림조합으로 이관되면서 산림조합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독일에서 연수를 받았다던데
Image_View80년대 초에 독일로 임업연수를 떠났다. 독일에서의 충격은 지금까지의 임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200년간 조성됐다는 인공림인 흑림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웅장했다. 숲이 너무 빽빽해 검게 보인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1년생부터 100년생까지 골고루 조성된 가장 이상적인 산림이었다. 흑림을 보면서 우리 임업의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임업은 독일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벌기령(벌채시기)부터가 다른데 우리의 소나무는 50년인 반면 독일은 150년으로 3배가 차이났으며 참나무의 경우는 300년이 지나야 벌채가 가능해 참나무 하나를 베면 벤츠를 한대 살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것과는 그 가치가 달랐다.


독일의 임업은 어떠한가
독일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다수가 영림서 서장이 꿈이라고 대답한다. 여대생들의 배우자 직업순위를 조사하면 1위가 역시 영림서 서장이라고 한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이 임학과에 합격하면 우리가 서울대에 합격한 것처럼 자랑을 하고 다니는 국민들이다. “우리는 2대째 임업인이다”라며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의 산림공무원은 최고 대우를 받는다.
월급도 많고 서장이 되면 관사도 제공받으며 군인들처럼 유니폼도 있고 계급장도 있다. 독일의 재벌들이나 할 수 있는 사냥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또한 독일사람들은 도시에 사는 것을 싫어하므로 당연히 좋은 직업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와 독일 임업의 다른점은
독일은 꾸준한 홍보를 통해 국민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200년 전부터 숲의 중요성을 인식시켰기 때문에 독일국민들은 나무를 가꾸는데 드는 돈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독일의 임업은 생산성이 있다. 대경재 생산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고급재는 외국에 수출하고 저급재는 수입해서 사용하므로 이익을 내고 있다. 조바심 내지 않고 오랜기간 꾸준히 투자해온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임업은 원자재의 특성상 당장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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