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목재신문=김미지 기자] 최근 ‘궁(宮)세권’ 대표 지역으로 재조명되는 곳이 있다. 회색빛 시멘트 건물 사이로 전통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바로 ‘북촌’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가 모여 살았던 곳으로 풍수지리적인 면에서 살기 좋은 동네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서울의 과거와 현대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매력적인 동네로 꼽힌다. 그중 북촌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예술적인 경치를 자랑하는 가옥이 있다. 전통 한옥의 양식과 근대적 가옥의 특징이 어우러진 백인제 가옥에 가봤다.

 

최상류층 가옥 주인들의 안목…‘압록강 흑송’ 최고급 한옥 탄생

무늬 장식벽이 돋보이는 안채는 'ㅁ자형' 구조로 지어져 당시 여인들이 살았던 폐쇄적인 집의 형태를 보여준다.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에 의해 지어졌다. 이후 한성은행, 최선익 등을 거쳐 백인제 선생에게 소유권이 넘겨졌다. 가옥의 첫 번째 주인이었던 한상룡은 2,460㎡의 대지 위에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집을 지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압록강 흑송(黑松)’으로 지은 최고급 한옥이었다. 1928년 한성은행이 백인제 가옥을 소유하게 됐는데, 당시에는 천도교 단체가 가옥을 임차해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겸 회합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935년에는 개성 출신 언론인 최선익을 거쳐 1944년 백인제 선생과 그 가족들이 가옥의 주인이 됐다. 현재 가옥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 백병원의 설립자이자 당시 외과 수술의 대가였던 그는 국내 의학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68년 백인제 선생의 부인 최경진씨가 한옥의 모습을 보존하며 살아오다가 2009년 서울시가 집을 매입하게 된다. 한옥의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민족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근대 한옥이 됐다.

 

근대 양식을 담은 독특한 한옥 구조

북촌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별당채는 지면으로부터 마루를 높이 띄워 지면의 습기를 피하고 통풍 기능을 살린 '노마루' 구조로 지어졌다.
1 상류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부챗살 모양의 '선자서까래'는 통풍 기능과 심미성을 갖춘 서까래 양식이다. 2 천장을 따로 만들지 않고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만든 '연등천장' 또한 상류층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다.

백인제 가옥은 당시 한옥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전통 한옥 양식에 근대 양식을 접목시킨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복도로 이어진 안채와 사랑채. 이 두 공간을 확실하게 구분지었던 다른 전통 한옥들과는 다르게 백인제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두 곳이 복도로 연결돼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또 하나 큰 특징은 안채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됐다는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한옥들은 단층 구조로 지어졌지만, 백인제 가옥은 근대식 건축 양식을 접목시켜 한 층을 더 쌓아 올렸다. 백인제 선생이 살았을 때는 이곳을 창고로 썼다고 한다. 또한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사용한 것도 전통 한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이다. 백인제 가옥이 이러한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은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 한상룡이 가옥의 주인이었던 시절, 단순한 주거의 용도로만 집을 사용하지 않고 고위관계자들과 회담을 진행하거나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사랑채 바깥으로 큰 정원이 갖춰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사회 인사들이 모였던 장소이니 만큼 근대적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최상류층이었던 집주인의 권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 상류층의 삶을 엿보다…미국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연회 즐겨

3 전통 한옥과 달리 백인제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긴 복도로 연결된 근대식 양식 구조를 사용했다. 4 최상류층이 살았던 백인제 가옥에는 집안 곳곳 서양식 가구와 소품이 갖춰져 있다.

백인제 가옥을 구석구석 살펴보면 집 주인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을 찾을 수 있다. 가옥은 크게 간채, 사랑채, 안채, 별당채, 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유난히 높은 대문간채다. 당시 양반들이 가마를 타고 생활했기 때문에 대문이 높아야 편하게 출입이 가능했다. 또한 조선 사대부가의 솟을대문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사랑채는 남성들의 권위를 상징하며 소유주들의 사회적 활동의 배경으로 삼은 공간이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총독들과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사랑채는 창문을 열면 바로 마당으로 연결돼 있어 일부 공간을 무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포도가 그려져 있는 병풍과 박쥐 모양을 한 모서리 장식은 다산을 상징한다. 여성들과 아이들이 생활하던 안채는 전체적으로 ‘ㅁ자 구조’를 하고 있으며 중문과 2중문을 설치해 폐쇄적인 공간을 연출했다. 중문간채를 열고 들어가면 안채 앞마당에 태극문양의 장식 벽을 볼 수 있다. 하양, 빨강, 파랑의 삼색 태극무늬는 하늘과 땅, 사람을 뜻하며 좌우로 새겨진 복(福)자와 수(壽)자는 행복과 장수를 뜻한다. 이곳 안채는 1950년에 인민재판소로 쓰이기도 했다. 집의 가구들을 치운 것도 그때였다고 한다. 백인제 가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별당채는 북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별당채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비와 김태희가 결혼식을 올렸던 가회동 성당과 겨울연가, 도깨비의 촬영 장소였던 중앙 등학교를 볼 수 있다.

야간 개방 시간에 정원에서 바라본 사랑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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