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당 옆에는 구수한 장독대가 늘어서 있고, 밤이 되면 짙은 남색 하늘 가득 별이 차오르는 곳. 선친과의 오랜 추억을 담고 있는 대지 위로 집을 쌓아 올렸다. 완전히 새로운 집이나 건축주의 기억을 배려한 설계와 구조물은 시선이 닿는 곳에, 발을 뻗는 곳에 익숙함을 남긴다. 낯섦과 익숙함, 그 경계에 놓인 수류헌을 만나보자.  

건축가 집안의 집을 짓다
건축주 부부 중 남편인 류종우씨는 모 대기업 건설사에서 퇴직하신 분이며 두 내외의 딸과 사위는 모두 건축을 전공하고 해외현장, 그리고 국내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야말로 건축가 집안인 셈이다.
건축 분야에 있어 전문가임에 분명하지만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일을 좀 더 객관화하고 두 분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중간자로서의 입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건축가가 설계를 맡게 됐다.

오래된 터에서 새로이 일어서다
수류헌(隨遛軒)은 건축주 부부가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귀향해 지은 집이다. 집이 자리한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는 건축주 중 아내인 민정애씨가 태어나 자란 고향으로 선친과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이 터에 지어진 옛집은 1949년에 건축돼 증축을 거쳐 무려 60년의 세월 동안 두 세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집이었다.
그렇기에 건축사사무소 이인집단의 이영재 건축가는 기존에 지어진 옛 집에서 많은 것을 남기기로 했다. 오랜 도시 생활 끝에 지쳐 있는 두 부부를 맞이할, 그리고 함께 살아갈 새 공간에 옛 기억을 덧씌우고 싶었다.
말하자면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그런 집을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오래전에 지어져 뒤죽박죽인 경계는 이웃집, 도로 등을 침범하고 있었고 부분철거 또한 구조적인 문제로 여의치 않았다. 결국 전부 부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평범하지만 곳곳에 옛 기억을 담았다
시작은 우울했다. 옛 기억의 작은 편린조차도 찾아볼 수 없이 텅 비어버린 땅 위를 망연자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단 건축주 뿐만은 아니었다.
온전히 남겨놓고 싶었고, 다음에는 일부라도 살려놓고 싶었던 과거가 일순간 사라진 데에 대한 서운함. 그 눈빛은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이었다. 이영재 건축가는 과거의 집과 지금의 집을 어떻게 이어나갈지를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로 판단했다.
집 자체는 평범한 단층집이었기에 설계부터 시공이 마무리 될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한 별다른 요구사항을 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다만 기억의 이식에 필요한 전이체, 그 매개물질에 의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건축가의 발목을 잡았다. 기억을 떠올리게 할 매개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 때 곳간에 나락을 채우고 한 장 한 장 아래서부터 닫아왔던 판문들이 고재로 남아있었다. 그나마 온전한 상태로 유일한 재료였기에 나무를 다루는 지인에게 보여주고 이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고심한 끝에 식탁 위를 비추는 조명을 제작했다. 그리고 조명의 의미에 대해 건축주에게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히 조명이 갖는 의미를, 의도를 건축주는 이영재 건축가와 크게 다르지 않게 받아들였다.

커다란 창은 또 하나의 소통창구
새로운 집은 기존의 집과 유사한 배치로 만들어졌다. 외관부터 내부까지 전혀 다른 집이나 발이 향하는 동선은 어쩐지 익숙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건축주가 이 동네의 토박이인 점과 수십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점을 고려해 주방에서 앞길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창을 하나 냈다.
집 앞을 지나는 어느 누구도 놓치지 않고 말을 나누는 건축주의 성향에 안성맞춤인 설계다. 또한 그들을 집안으로 불러 들여 쉬게 할 공간도 필요했기에 주방 모퉁이 창이 마을의 중심인 회관을 바라보게 했고 널따란 마당을 통해 거실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안방과 침실을 구분해 안방이 침실의 전실이 되게 했으며 안방은 취미 공간이 됐다. 창고의 뒤편에는 작은 아궁이를 가진 온돌방이 있어 사랑방 역할은 물론, 멀리서 찾아올 반가운 손님들을 위한 사랑방으로도 활용된다.
그렇게 마음과 풍경에 녹아들다
이 집은 새로운 기억을 보태기 보다는 지금까지 지녀왔던 기억은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 앞으로의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수 있게 하는 데에 중점을 뒀다. 그렇게 하나하나 고심 끝에 쌓아올린 집은 마음에 녹아들고 주변 풍경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툇마루를 갖추고 앞뜰과 조그마한 뒤뜰도 있다. 이전에 지내던 집과 유사한 형태다.
뒤편에 위치한 산새도 마당에서 보면 지붕 위를 지나고, 옆을 흐르는 강은 종종 물안개로 변해 집 주변에 잠시 머물다 간다. 외장재로 쓰인 탄화 적삼목은 그런 주변에 겉돌지 않고 쉬이 동화되고, 짙은 회색빛의 지붕은 산과 하늘에 잘 어우러진다.
눈에 띄지 않되 그렇다고 남루하거나 초라하지도 않은, 수류헌은 금세 고즈넉한 시골 동네의 풍경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어울림이 수류헌의 두 번째 특징이다.

건축사무소 이인집단 소개
건축사사무소 이인집단은 2014년에 설립됐다. 건축가 이영재는 국립경상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가와건축, 노바건축 그리고 공간건축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이제는 건축을 위한 새로운 안목, 그리고 집을 설계하고 책을 읽고 또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보는 건축가를 꿈꾸고 있다. 이인(異人)이란 이름은 무릇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존재와 더불어 행함을 바탕으로 출발하고픈 의지를 담고 있다.

수류헌(隨遛軒)

대지위치(주소):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대지면적: 436㎡
건축면적: 141.61㎡
연 면 적: 141.61㎡
공        법: 경골목구조      
마 감 재: 열처리목재(루나우드), 적삼목사이딩      
지 붕 재: 칼라강판
설     계: 건축사사무소 이인집단 (070-7706-5100)
시       공: 나무이야기
(02-333-5863)
사       진: 스톤포토
(석정민, 010-8891-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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