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클보드의 역사 Ⅴ

세계 파티클보드의 역사
세계 파티클보드의 역사를 살펴보면 1887년에 언스트 허바드(Ernst Hubbard) 씨가 저술한 「목재폐재의 이용」이란 책에서 톱밥과 동물의 혈액알부민을 혼합한 후 열압한 인공목재의 제조를 제안한 것이 파티클보드에 관한 세계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크라머(Krammer) 씨가 1889년 세이빙과 아마포(亞麻布)를 적층·접착해 보드의 특허를 출원했고, 1905년에는 파티클보드의 발명자로 일컬어지는 왓쓴(Watson) 씨가 얇은 파티클을 열압·성형해 파티클보드의 특허를 제출한 것 등이 문헌에 나와 있다.
이후 힘멜 헤버(Himmel Heber, 1929년), 카르손(Carson, 1936) 등에 의해 합성수지의 사용, 생산시스템의 자동화 등 실제 생산라인에서의 적용을 위한 기술개발이 이뤄졌다. 세계 최초의 상업용 파티클보드 공장은 1941년 독일의 디아스(Dyas)社에 의해 건설됐다.
제2차세계대전중에는 합성수지 원료의 부족으로 파티클보드 공업이 정체됐으나, 전후에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한 기술적 발전을 이루면서 다양한 형태의 파티클보드가 개발됐다.
참조; 목재공학개론

넓은 의미의 파티클보드
넓은 의미의 파티클보드에는 칩보드(chip board;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고 있는 파티클보드를 칩보드라고도 함), 세이빙보드(shaving board), 플레이크 보드(flake board)가 포함되고 있으며 웨이퍼보드(wafer board), OSB(Oriented strand board)도 파티클보드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웨이퍼보드나 OSB는 파티클보드 범주를 벗어나서 독립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아직 의견이 통일돼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는 OSB의 수입량을 파티클보드 수입량에 포함시켜 통계를 내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OSB도 파티클보드에 포함된다고 인정하는 나라인 것 같다.

OSB와 웨이퍼보드의 역사
OSB(Oriented strand board)는 배향성 목재가닥 보드로서 1954년 美國의 제임스 박사(Jame's d' Clark)가 개발한 제품인데, 1961년 캐나다 동부에 최초의 OSB공장이 설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OSB와 웨이퍼보드의 원료로는 아스펜(Aspen, 포플러, 백양나무, 사시나무 등)이 사용됐는데 아스펜은 비중이 낮아 스트랜드(목재를 국수가닥같이 만든 것)나 웨이퍼(목재를 대팻밥같이 만든 것)로 만드는데 절삭이 잘되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OSB나 웨이퍼보드가 칩보드(파티클보드)와 다른 점은 폐목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79년, 국내 파티클보드 생산량
1979년은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해이다. 1978년 말 이란의 정변을 계기로 OPEC에서 석유가격 인상조치를 함으로써 제2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것이다. 원유가격이 1년 사이에 2배로 올랐다. 세계경제는 또 다시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기업들의 수입도 악화됐고 실업자가 급증했으며 물가상승과 경기후퇴가 동시에 일어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빠지게 됐다. 세계 각국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수요억제정책을 실시함으로 실질 성장률은 급강하했다.
1978년 12월 27일이라고 기억된다. 필자는 말레이시아 사바주 대성목재 주재원으로 타와우(Tawau)에 주재하고 있을 때였다. 내년에는 원목가격이 대폭 상승할 것이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부랴부랴 평소 때 거래해오던 쉬퍼(당시 대성목재 주 거래 쉬퍼는 합생이라는 회사였다)를 찾아가서 다음 달 선적분 원목가격을 결정하자고 했다. 그랬더니 당신은 항상 매월 초에 원목가격을 결정하지 않았느냐며 내년 1월 초에 보잔다. 그들도 내년 초에는 원목가격이 대폭 오를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상사 주재원들도 물량 확보에 나섰지만 원목 수출회사들은 전연 계약에 응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1979년 1월 4일, 그들이 내 놓은 가격은 12월 가격보다 10불이나 오른 가격을 제시했다.
1978년 12월 가격은 입방당 90불이었는데, 100불을 제시한 것이다. 깎고 자시고 흥정도 필요없었다. 1월 10일에는 105불이 됐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자고나면 가격이 올랐다. 그 해 5월에는 140불이 됐고, 7월에는 170불, 8월에는 200불까지 치솟았다. 필자가 경험한 79년 제2차오일쇼크 현상이었다. 1979년 국내 파티클보드 생산 캐퍼는 대성목재 연 3만, 동화기업 제1PB 연 4만8천, 동화기업 제2 PB 연 4만5천 등 연 12만3천㎥이었으나 실제 생산량은 5만5천㎥인 것으로 합판보드협회 자료에 기록돼 있다. 아마도 제2차오일쇼크 여파로 국내경기가 안 좋아져서 각 회사들이 생산량을 줄인 것으로 사료된다.

1980년 7월, 동명목재 파티클보드 공장 문 닫아
1980년 7월 5일, 한국 합판산업을 주도해왔던 부산의 동명목재상사(회장 강석진)는 계속 앙등되는 원목 가격에 견디지 못하고 종업원 3,000명에게 해고통지서를 발송하고 문을 닫았다.
동명목재가 문을 닫게 된 과정을 여기서 다시 기술할 수는 없지만 어쨋든 동명목재가 문을 닫음으로서 1972년 가동에 들어갔던 동명목재 파티클보드 공장도 설립된지 8년 만에 동명목재 합판공장과 함께 가동이 멈췄다. 동명목재는 1979년 2차 오일쇼크 여파에 직격탄을 맞은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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