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클보드의 역사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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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클보드의 역사 Ⅲ
  • 김상혁 상임고문
  • 승인 2014.07.17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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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材産業史-파티클보드편 3

파티클보드의 역사 Ⅲ

보드산업의 태동
국내에 파티클보드가 처음 탄생한 것은 1965년이다. 당시에는 원목수급이 원활해 합판과 동남아 원목 위주의 시장이 형성됐었고, 보드는 큰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국내에서 최초로 파티클보드 공장을 건설한 회사는 대성목재(대표 전택보)이다.
보드산업의 시초는 인천의 대성목재가 1965년 파티클보드 공장을 건설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파티클보드는 합판을 만들거나 제재를 할 때 발생되는 부산물(죽데기 등)을 파쇄기를 이용해 작은 나무조각(chip)으로 부순 후 수지를 첨가해서 성형시킨 목질판상재이다.
불을 때거나 버려지는 폐자재를 원재료로 사용함으로써 자원재활용 측면이나 환경보호 측면에서 부가가치를 구현하는 산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합판공업, 제재업 등 노동집약적인 목재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장치산업인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기점이 된 산업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제재소에서 발생되는 죽데기, 가구를 만들 때 나온 나무조각, 주택건설을 할 때 발생된 폐자재 등이 버려지거나 난방용 또는 취사용 화목으로 불을 때는데만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대성목재는 합판공장 자체에서 발생되는 부산물만으로는 양이 모자라 인근 제재소에서 발생되는 죽데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인천의 여러 제재소들은 불을 때거나 버려야만 했던 죽데기를 차에 싣고 대성목재에 화목이란 이름으로 팔아서 돈이 되니 제재소 운영에 도움이 됐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파티클보드는 합판보다 표면이 매끄러워 오버레이 가공에 적합했고 가격도 저렴해서 주택내장용 또는 주방가구용으로 많이 사용됐다.
그러나 당시 피티클보드의 품질은 지금의 파티클보드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엉성한 품질이었다. 강도도 약하고 완전히 접착이 안돼서 부스러지기도 일쑤였다.
대성목재 파티클보드 공장 건설이후 7년이란 세월이 흐른 1972년 인천의 동화기업(대표 승상배)이 파티클보드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건설산업 및 가구산업에서 합판이 대세를 이룰 때였지만,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은 제재사업에서 발생되는 막대한 양의 부산물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파티클보드 공장 건설을 계획했던 것이다.
1972년 6월에 파티클보드 공장을 착공했고, 7개월만인 1973년 1월에 동화기업의 파티클보드 공장은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1972년 부산의 동명목재도 파티클보드 공장을 준공해 가동에 들어감으로써 국내 보드산업은 대성목재와 동화기업, 동명목재 3개 회사가 보드산업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보드산업의 중흥기
1970년대 후반 들어 파티블보드 산업은 중흥기를 맞이했다. 1977년 11월에 동화기업(대표 승상배)은 또 하나의 PB 공장 건설에 착수해 1978년 6월부터 본격가동에 들어갔고, 1979년 3월에는 부산의 태창목재(대표 정해찬)도 PB 공장 건설에 착수해 1980년 2월부터 가동했다.
이로써 1970년대 후반에는 인천의 대성목재, 동화기업, 부산의 동명목재, 태창목재의 PB 공장이 가동되고 있어 4개 회사가 국내 파티클보드 공급에 나섰다. 1979년 1차 오일쇼크로 해외 원목가격이 급등했고, 남양재 원목의 주요 공급국인 인도네시아가 원목 수출을 금지하는 등 원자재 확보가 난관에 부딪히자 비싼 원목으로 합판을 만드는 것 외에도 버려지는 부산물로 판상재를 만들어 외화절약을 하자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파티클보드의 품질은 엉성했지만 합판가격에 비해 3분의 1수준으로 가격이 저렴해 일반 가구업계 및 주방용 가구를 만드는 업체 등에서 소비는 급진적으로 늘어났다.
당시 아파트 건설이 한참일 때였고, 주택문화가 한옥에서 아파트로 바뀔 당시여서 아파트의 부엌용 찬장이나 신발장 또는, 아파트 거실용 소파들이 많이 필요할 때였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우리나라는 3저(低)현상에 힘입어 급속한 경제발전이 이뤄지고 있었고, 국민의 생활수준도 향상돼 파티클보드의 수요가 급신장했다.
그러나 합판산업은 위기를 맞이하는 때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원목 생산국들이 원목을 자원무기화하자 국내에서는 합판산업 구조조정 움직임이 있었고, 1980년 원목 가격상승을 견디지 못해 부산의 동명목재가 문을 닫음으로써 동명의 PB 공장 역시 문을 닫았다. 1981년 부산의 태창목재도 막대한 빚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게 되자 태창목재의 PB공장도 문을 닫았다. 이로써 1982년 우리나라는 인천의 대성목재 PB 공장, 동화기업 제1 PB 공장, 제2 PB 공장까지 3개 공장만이 가동돼 당시 PB 생산량은 연산 12만3,000㎥에 불과했고 PB 수입량은 년 11만㎥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PB 수요량은 23만㎥에 불과했던 것이다.

김상혁 상임고문   wwi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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