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클보드의 역사 Ⅰ

우리나라 목질보드산업의 역사는 파티클보드로부터 시작된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는 동화기업(대성목재 포함)과 부산의 성창기업만이 파티클보드 공장을 갖고 있어 MDF 공장보다 그 수에 있어서나 생산량에 있어 열세이지만, 실은 MDF 이전에 파티클보드가 먼저 시작됐다.

1965년 대성목재, 우리나라 최초로 파티클보드 공장가동
파티클보드는 톱밥, 대팻밥, 죽데기 등 목재폐기물을 분쇄해 칩(chip)으로 만들어 접착제와 함께 압축공정을 거쳐 제품화한 것으로 주방가구, 싱크대 찬장, 전자제품 케이스, 선박내장 등에 사용된다.
1965년은 합판수출이 한참 잘 될 때인데 인천시 만석동에 위치한 대성목재는 일산 4만2,000매의 합판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합판을 많이 만들다보니 부수적으로 죽데기, 톱밥등 목재폐기물이 많이 발생됐다.
당시 대성목재의 총무상무로 재직중인 김 상무(성함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파티클보드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김 상무는 대성목재 사장인 전택보 씨(당시 64세)에게 파티클보드 공장을 지을 것을 건의했다.
대성목재는 1964년 2월 파티클보드 공장 건설에 착수해서 1965년 2월, 드디어 일산 100㎥(년산 3만㎥ 규모)의 파티클보드 공장을 준공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합판공장의 부산물을 원료로 활용하기 위해 시작된 파티클보드 공장은 오늘날 버려진 목재폐기물을 우리생활에 필요한 생활가구의 원재료를 만들고 있다.

원재료는 합판공장 부산물과 제재소 화목
당시 원재료로는 합판공장에서 발생되는 부산물(합판죽데기, 톱밥, 단판을 깎을때 나오는 죽데기 등)을 주로 사용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인천의 제재소에서 발생되는 죽데기(소위 말하는 화목)를 사들여서 원재료로 사용했다.
화목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무게로 사들였는데 경비실 옆에 화목을 싣고 오는 화물차의 무게를 측정하는 기계를 설치해 놓고 무게에 따라 돈을 지불하도록 했다.
무게로 사들이다 보니(무게로 사들일 수 밖에 없었지만)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제재소에서는 무게를 더 나가게 하기 위해 화목에 물을 뿌려 젖은 화목을 납품하기가 일쑤였다. 대성목재는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불평없이 사들였다. 1980년으로 기억된다.
당시는 대성목재를 효성물산이 인수해서 운영할 때였는데 필자는 백영배 전무 직속기구에 근무할 때여서 매월 기획실에서 손익보고를 하는 회의에 참석했는데 파티클보드의 이익이 80%를 넘는 것을 봤다. 참 이익이 많이 나는 품목이구나 생각한 일이었다. 당시 화목값이 톤당 8000원 할 때 였는데 몇 달 후 톤당 10,000원으로 인상됐다. 그래도 파티클보드의 손익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대성목재 파티클보드 공장을 운영했던 사람들
1965년 2월 대성목재에 입사한 박명도 씨(서울대 농대 임학과졸, 현재 미국 LA 거주)는 입사하자마자 파티클보드課의 사원으로 배치됐고 1970년 파티클보드課의 과장이 됐으며 1977년에는 동화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당시 동화기업의 파티클보드 공장을 짓는데 핵심멤버로 참여했다.
이어 1968년 대성목재에 입사한 문수일 씨(서울대 농대 임학과졸, 현재 말레이시아 산다칸 지역에서 제재소 운영)도 입사하자마자 파티클보드課의 사원으로 배치됐고, 1976년 파티클보드課의 과장으로 진급했으며, 1977년에는 말레이시아 대성목재 주재원으로 파견돼 원목수입을 담당해 파티클보드와는 인연을 맺었다. 1969년 대성목재에 입사한 윤승노 씨(고려대 농대 임학과졸)도 입사하자마자 PB課에 배치됐고, 1977년 과장으로 진급했으며 1987년 이사로 진급해서 대성목재 월미도 MDF 공장건설에 참여했다.
1972년 대성목재에 입사한 서경부 씨(서울대 농대 임학과졸)도 입사하자마자 PB課에 근무했고 1978년 동화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동화기업 파티클보드공장 운영에 참여했으며 1986년에는 거성산업 김동수 회장의 초청을 받아 동인보드 파티클보드공장 건설 및 MDF 공장건설에 핵심멤버로 참여했으며 1994년에는 한솔포렘의 이사로 MDF 공장건설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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