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기업 주식회사 Ⅳ

동화기업, 대일(對日) 제재목 수출
동화기업은 남양재 라왕 원목 수입, 판매뿐 아니라, 자체 제재소에서 제재한 라왕 제재목을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1972년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라왕 제재목 수출을 활발히 하고 있을 때 였는데 동화기업(대표 승상배)뿐 아니라, 신흥목재(대표 이훈돈), 보루네오(대표 김병수), 삼미사(대표 김두식)등도 라왕 제재목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어서 연간 1500만 달러의 제재목 수출이 이뤄졌다.
1973년에는 대일(對日) 제재목 수출이 20 00만불로 늘어났는데 이때는 동양목재(OLC, 대표 박률선), 대이산업(대표 엄중섭), 현대신건재(대표 윤순선)도 라왕 제재목 수출에 참여해서 수출량이 늘어났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제재목 수요가 점차 늘어나게 된 이유는 일본 내에서 제재공장은 공해 등으로 인해 점차 사양화 돼가고 있어 대한(對韓) 수입의존도가 점점 높아졌고 1974년에는 5000만 달러의 라왕 제재목이 수출됐다.

1972년 6월, 파티클보드 공장 착공
1972년,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은 제재단지 내에서 발생되고 있는 수많은 양의 부산물(제재하고 난 뒤 죽데기, 톱밥 등)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안으로 파티클보드 공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다.
1972년 당시에는 우리나라에는 인천 만석동에 위치한 대성목재만이 파티클보드 공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는데(1965년 2월 가동시작) 인천 제재단지에서 발생되는 부산물들이 거의 대부분 대성목재에 싸게 팔려나가고 있었다.
이를 본 승상배 사장은 내가 파티클보드 공장을 지으면 저 부산물들의 부가가치를 내가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내에 파티클보드 공장을 지을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때여서 미국의 유명한 회사와 합작으로 공장을 건설할 것을 계획했다.
승상배 사장(당시 52세)은 미국의 ‘골든 스테이트빌딩 프로덕트社’와 접촉하게 됐고 마침 두 회사의 의향이 맞아 떨어져서 두 회사가 합작으로 파티클보드 공장을 지을 것을 합의 하게 된다. 두 회사가 합작으로 파티클보드 공장을 짓되 인천에 있는 동화기업 부지에 짓기로 하고, 총사업비를 300만달러(당시 돈으로 12억6천만원)로 책정하고 동화기업과 미국 회사측이 50:50으로 투자하는 것으로 했다.
미국회사측은 150만 달러 상당의 기계 설비를 투자하고 동화기업 측은 12000평의 토지를 제공하고 2000평정도의 공장건물과 1300평 정도의 창고 건물을 짓기로 했다.
드디어 1972년 6월 공장건설 착수에 들어갔다. 이 공장은 일산 150㎥(년산 4만5000㎥) 규모로 지어졌는데 공장운영은 동화기업측이 이익금은 반반씩 나누기로 하되, 가동 후 5년간은 이익금 중 20%를 미국 측에 더 주기로 했으며 10년차에는 동화기업의 소유주가 100% 되도록 합의했다. 이 공장은 착공한지 7개월만인 1973년 1월 완공돼 본격가동에 들어갔다.

생산초기에는 판매부진
이로써 우리나라에는 1965년 가동된 대성목재의 파티클보드 공장과 1973년 가동된 동화기업의 파티클보드 공장으로 두 개의 파티클보드 공장이 가동됐는데 동화기업은 초기 판매에서는 대성목재에 밀렸다.
재고는 날이 갈수록 쌓였다. 그러나 승상배 사장은 계속적인 생산을 지시했고, 결국 건조장 창고까지 파티클보드가 가득 차는 현상까지 빚어졌다. 당시 돈으로 1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재고가 쌓였지만 승상배 사장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동화기업은 판로개척을 위해 파티클보드를 원재료로 사용하는 주방가구업체와 일반가구업체에 영업력을 총 집중했다. 그 결과 가동 4개월 만에 조금씩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1년만에는 재고가 바닥이 났다. 중단 없는 추진력으로 시련을 극복한 승상배 사장의 사업적 수완이 통했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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