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기업 주식회사 Ⅲ

1971년, 인천제재단지 조성
1969년 ‘동화개발호’를 완공한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은 저목호 안쪽 대지 5만 3000여평에 제재소를 여러개 지어 임대하면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울과 인천 등지의 도심에 있는 제재공장들이 이곳으로 오게 되면 기존 제재소에서 제재목을 만들 때보다 제조원가가 적게 들 것이므로 많은 제재소가 이곳으로 올 것으로 생각했다.
즉 이곳에서 제재목을 만들 경우 원자재인 원목의 운반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라왕 원목 1㎥ 제재하는데 1920원 57전(재당 6원 40전)정도로 시내 제재소에서 제재할 때보다 10% 정도 제재비가 싸게 든다는 것이었다.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당시 51세)은 이러한 사실을 사업계획서로 만들어 농림부에 제출했다. 농림부는 이 사업계획서를 받아보고 사업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1970년 2월 20일 경제장관회의에 상정했다. 경제장관회의에서도 이 계획의 타당성이 인정돼 사업승인이 났고 동화기업은 곧바로 건설에 착수했다. 저목호 안쪽에 일렬로 1000평 가량의 제재소 30여개를 짓는 공사였다. 드디어 1971년 5월, 착공한지 1년 3개월 만에 제재소 30여개가 지어졌다. 당시 사람들이 일컫는 ‘인천제재단지’가 조성됐다.
소요자금으로는 당시 돈 12억 5000만원이 투입됐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아마 625억원쯤 될 것이다. 서울·인천 등지에 있던 많은 제재소들이 이곳으로 이전했다. 서울 마포에서 ‘마포제재소’를 운영하는 김근호씨가 이곳으로 제재소를 이전했고, 필자가 기억나는 것은 제15호 제재소 ‘우성목재’다. 우성목재 김동수 사장(대성목재 출신)이 이곳에 제재소를 차린 것이다. 우성목재는 제재만 한 것이 아니라 말레이시아에서 라왕 원목을 수입해서 동화개발호에 저장해놓고 시중에 판매도 했다. 당시 필자도 여러 번 이곳에 가본 적이 있지만, 동화개발호를 앞으로 하고 제재소가 일렬로 30여개가 쭉 늘어서 있었고, 이들 제재소는 동화개발호에 저장돼 있는 라왕 원목을 사서 자기 제재소 입구에 가져다놓고 하나씩 건져 올려 제재를 하곤 했다. 시내에서 제재소를 운영할 때처럼 별도로 저장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차량으로 원목을 운반해 와야 하는 운반비가 드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제재소들도 그렇지만 시내의 제재소들은 제재시설 외에 별도의 원목 저장 장소로써 적어도 500여평 가량은 필요 했을 때였다. 당시 인천 제재단지내의 제재소들은 저장 장소비, 운반비 등이 원가에서 절감됐던 것이다.
각 입주업체는 2500만원의 입주금을 부담하게 돼있었는데 대지 800평의 각 공장에는 54인치 라왕 제재 시설과 42인치 미송 제재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이 제재단지는 생산한 제재목을 판매 경쟁하지 않고 입주업체 모임인 ‘한국제재공업단지판매주식회사’를 통해 경인지구에 판매했다. 당시 판매 가격은 라왕 소활재는 재당 40원, 판재는 재당 85원 이었는데 이는 시중가격보다 10% 싼 가격이었다.

1971년 5월, 공유수면 매립허가 획득
동화기업(주) 승상배 사장은 인천 가좌동 지역의 바다, 즉 공유수면 65만 7천평을 매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농림부에 제출했고 농림부는 이 계획서를 경제 각료회의에 상정했다.
경제 각료회의는 1971년 5월, 매립허가를 승인했다. 이 매립계획서는 원목 하치장을 조성하겠다는 것으로써 매립허가일로부터 3년간 공사를 하도록 했다.

1972년 5월, 인천제재단지 내에 공동목재건조장 건설
대한제재공업협동조합(당시 이사장 최진수)은 동화기업 소유 인천제재단지 내에 공동목재 건조장을 설치하기로 동화기업측과 합의하고 1971년 10월 15일 건조장 건설에 착수했다.
착공한지 7개월만인 1972년 5월 26일 완공돼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이 공동목재건조장은 대시 1천평에 건평 180평의 건조시설을 갖춘 것으로써 연간 12000㎥의 제재목을 건조 할 수 있는 최신식 목재건조시설이었다.
종래의 간접 가열식에서 직접 가열식으로 만들어진 완전 자동식 특수 열처리 건조시설이었으며 외국의 건조시설 못지않게 완전 건조가 가능했다.
이 건조장 건설에는 조합 자체자금 3천만원과 중소기업 시설지원자금 3천만원 등 도합 6천만원이 투입됐다. 1972년은 대일(對日) 라왕 제재목 수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을 때였는데, 이 건조장 시설로 인해 년간 50만불 수출에 불과했던 라왕 제재목 수출이 연간 100만불까지 수출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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