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기업 주식회사 Ⅱ

지금은 매립돼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동화개발호’
당시 사람들은 이 저목호를 ‘동화개발호’라고 불렀다. 1970년 동화기업이 ‘동화개발’이라는 현지 법인명으로 인도네시아 원목 산지 개발에 나서면서 당시 동화기업 보다는 동화개발이라는 사명이 더 널리 알려졌었다.
1969년부터 1975년 당시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수입되는 라왕 원목은 거의 대부분이 물에 뜨는 원목이어서 원목 수입업자들이 원목을 수입하면 물에 띄워서 저장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대성목재나 선창산업 같은 대형 합판회사들은 원목을 수입하면 자체 저목호를 보유하고 있어 그곳에 원목을 저장할 수 있었으나 일반 수입업자들은 수입한 원목을 저장할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1960년부터 1970년대 목재업에 종사했던 사람이라면 인천 가좌동에 있었던 ‘동화개발호’를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매립돼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고 그 자리가 지금 어디인지조차 알 길이 없지만, 당시 그 큰 호수처럼 생긴 넓디 넓은 저목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당시 재계(財界)에서는 유일하게 남양재 원목에 손을 댄 효성물산(당시 대표 조홍제)도 인도네시아에서 라왕 원목을 수입하면 동화개발호에 원목을 저장하고 시중에 판매했다.
당시 잡목계의 거두 대신목재 김종수 사장도, 옥산실업의 최득수 사장도 이 동화개발호에 잡목을 저장해 놓고 충청도나 강원도에서 원목을 사러오면 이곳에서 판매를 했다. 물론 저목호 사용료는 동화기업측에 지불했다. 당시 저목호 사용료는 재당 1원인가 0.5원인가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1970년 8월, 동화기업이 대성목재와 원목을 교환하다
제재업계와 합판업계 첫 원목 교환

1970년 8월, 동화기업(대표 승상배)은 판매용으로 수입한 원목중에 합판용으로 쓸 수 있는 원목을 대성목재 측에, 대성목재(대표 황필주)는 합판용으로 수입한 원목 중 부적재를 동화기업측에 양도하기로 하는 원목 교환계약을 맺었다.
교환조건은 저질(低質)원목을 양도하는 대성목재측이 수입원가의 5%를 동화기업 측에 프리미엄으로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제재업계와 합판업계가 이러한 원목 교환을 하는 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1970년 10월, 해외 산림개발 사업 진출
인니동화 현지법인 설립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은 1970년 해외산림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후일 인도네시아 굴지의 기업체인 코린도 그룹의 모태가 됐다.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당시 50세)은 1969년 9월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발릭파판(Balicpa pan)에 인니동화라는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동부에 위치한 15만㏊의 임지(林地)에 대한 기초조사를 한 후 드디어 1970년 10월 산림개발에 들어갔다. 동화개발의 해외산림개발사업은 남방개발(대표 최계월)에 이어 두번째였다.
당시 동화기업은 산림청으로부터 300만달러의 외화 대부를 받아 중장비를 구입해 투입했다. 그때 당시 동화기업이 300만 달러를 산림개발에 투자한 것은 상당히 많은 자금을 투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80년대 유원건설이 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에 ‘유림사리’는 현지 법인명으로 산림개발에 나섰을 때는 150만불을 투자한 바 있다. 물론 1970년대 싱가폴에 있는 한 회사는 인도네시아 사마린다지역에 원목개발 사업에는 500만불을 투자하기도 했다.

1972년 2월, 첫 개발한 원목이 인천항에 입항. 각계 인사들 참석해 입항식 가져
동화개발이 산림개발에 착수한지 1년4개월만에 칼리만탄에서 벌채된 원목 5000㎥(전량 제재용 원목)이 1972년 2월 20일 인천항에 입항돼 인천항 부두에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입항식(세리머니)을 가졌다. 물론 이 원목도 동화개발호에 저장돼 시중에 판매했다. 한달 후인 1972년 3월에는 2차 선적분 5,000㎥(합판용50%, 제재용50%)이 입항됐고 4월에도 3차 선적분 5000㎥이 인천항에 입항됐다. 매달 한 본선씩 생산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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