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상배 총회장
동화기업 주식회사 Ⅰ

창업주, 승상배 총회장
1953년, 하왕십리에서 제재소로 출발
오늘날의 동화기업 주식회사는 보드류 생산업체로 유명하지만 초창기에는 작은 제재소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1948년 4월, 창업주 승상배 씨(1921년생)는 동화토건(주)을 설립하고 건설 사업에 뛰어들었다. 승상배 총회장은 건설 사업을 5년간 운영하면서 목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53년 7월 서울 하왕십리에 동화기업이라는 작은 제재소를 차리면서 목재와 인연을 맺었다.

1965년, 인천 가좌동으로 제재소 이전
승상배 사장은 1965년도에 12년간 운영해오던 서울 하왕십리 제재소를 처분하고 인천시 가좌동으로 제재소를 이전했다. 서울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기 보다는 항구 도시인 인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는 것이 더 발전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업은 바로 남양재 수입 사업이었다.
인천으로 제재소를 옮긴 승상배 사장(당시 그의 나이 45세)은 남양재 수입 사업을 시작했고, 말레이시아로부터 라왕 원목을 수입해 제재소에서 켜서 판매하기도 했다.

1967년, 동양최대의 저목호 시설을 만들다
동화기업 승상배 사장은 남양재 라왕 원목 판매 사업을 하면서 라왕 원목을 육상에 쌓아놓고 판매하거나 아니면 남의 저목장을 빌려 저장해놓고 판매하는 등 불편함을 느꼈다.
인천에서 남양재 원목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다른업체들도 엄청난 불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승상배 사장은 바닷물을 가둬 저목시설을 만들 것을 생각한다.
당시 인천에는 바다를 매립하는 일이 흔히 있을 때 였다. 월미도에 위치한 대성목재, 선창산업 자리도 1967년도에 매립된 땅이었다. 승상배 사장은 바다를 매립하는 것보다는 저목시설을 만드는 것이 돈도 적게 들 것이고, 그에게는 땅보다는 저목시설이 절실히 필요했다.
당시 12만평이나 되는 넓은 바다를 저목호로 만든다는 사업은 보통 일반인이 구상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바다는 국가소유이고, 국가가 허락을 해줘야하는 사업이었다. 당시 승상배 사장과 김형욱 중정부장(63년 중정부장 취임, 69년 10월까지 재직)과의 친밀한 관계는 항간의 소문으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 사업에 김형욱 중정부장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성 소문이 있었다(그러나 사실로 확인된 바는 없다).
아무튼 승상배 사장은 1967년, 저목호 시설 사업승인을 얻어 11만 8000평의 바다에 둑을 쌓기 시작했다.

1969년, 저목호 시설 완공
2년간의 공사 끝에 1969년 저목호 시설을 완공했다. 동양최대의 저목호가 생겼다. 당시 그곳에 가본 사람들은 그 저목호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큰 호수 같은 형상을 구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 둑을 쌓고, 바다와 접한 둑 한가운데에는 개폐식 문을 만들어 만조 때 물이 들어 올때는 문을 열어 바닷물이 들어오게 하고, 간조 때에는 문을 닫아 들어온 물이 흘러나가지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원목을 바다에서 저목호로 끌어 올리는 톱니바퀴식 컨베이어도 설치했다.
바다에서 하역된 원목을 예인선으로 끌어오면 자동식 컨베이어로 곧바로 저목호에 집어넣는 시설이었다. 이 거대한 저목호를 만드는데는 동화기업 자체 자금 5억원이 투입됐다. 당시 5억원이면 지금 돈 250억원쯤 된다고 할까, 이 저목호는 원목 수용능력이 20만㎥ 였다.
당시 라왕 원목 1개의 재적이 4.5~5.0㎥였는데 라왕 원목 4만 여개를 수용할 수 있는 큰 저목호였다. 원목 한 본선이 6000㎥이라고 봤을 때 라왕 원목 1200개 정도 실리는데 원목 본선 33척분이 저장될 수 있는 큰 시설이었다.

* 1969년과 1975년 당시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수입되는 라왕 원목은 거의 대부분 물에 뜨는 원목이어서, 원목 수입업자들이 원목을 수입하면 원목을 물에 띄워서 저장할수 있는 장소가 필요할 때 였다.
대성목재나 선창산업 같은 대형 합판 회사의 경우 자체 저목호에 저장을 했지만, 일반 수입업자들은 수입하는 원목을 마땅히 저장할 장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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