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창산업 제재공장 Ⅱ

1972년 5월, 인천 북성동 합판공장 가동
선창산업이 합판공장을 서울 답십리에서 인천 월미도 북성동으로 이전 완료한 것은 1971년 12월이었다.
1971년 12월, 공장이전을 완료했지만 기계 및 설비보완작업을 1972년 2월에 완료했고 다시 정밀한 점검과 시운전 과정을 거쳐 5월에 들어서야 본격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72년 7월, 제재공장 가동
선창산업은 합판공장의 이전과 함께 제재공장 및 후로링 공장 이전도 함께 병행 추진했다. 제재공장도 수요기가 다가오기 전에 이전을 완료한다는 목표하에 1972년 3월 인천으로 옮긴 후 그 해 7월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제재공장은 수출품을 만들어 수출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 아래 건조 시설, 가공 시설도 함께 설치했다.


1979년, 제재공장 확장이전
선창산업(대표 정해수, 당시 대표 박승순)은 기존 제재공장이 합판공장과 상당히 인접해 있어서 발생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인근 삼신산업 뒤쪽에 있는 1만천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3,000평 규모의 제재공장 건물을 신축했다. 그리고 1978년 11월부터 이전공사를 실시했다. 기존 제재공장은 가구공장 옆에 일부 기계만 남기고 나머지 생산라인은 모두 새공장으로 이전했다. 또한 건조능력 배가를 고려해 7억원을 투자해 최신식 자동기계도 설치했다.
1979년 3월 완공된 건평 3,000여평 규모의 새로운 제재공장은 일산 제재능력 5만재 규모의 제재공장으로써 1979년 4월 시험가동을 거쳐 그해 7월 정상가동 했다. 선창산업의 기존 제재공장 규모는 건평 1,300여평에 일산 제재능력은 2만7천재였다. 이때 선창산업은 그간 제재공장의 부진했던 점을 감안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출 수 있도록 제재사업부를 신설하고 독립채산재로 운영케 했다. 제재사업부는 기존 제재공장과 신청 제재공장을 구분해서 운영했다.

정해수 사장, 23세 때 제재공장 운영
제재공장은 선창산업 창업주 정해수 사장에게는 남다른 인연이 있고 애착이 가는 업종이었다. 정해수 씨(1928년생)는 1951년, 23세 때 고향 봉화에 제재공장을 차렸다. 당시 부친 정태성 씨는 대구에 ‘성창기업 대구 합판공장’을 운영할 때였다. 정해수 씨는 당시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 부친을 돕기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독자적으로 자기 사업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재업은 부친이 봉화에서 ‘성창임업’을 운영했으므로 어릴 때부터 직·간접적으로 체험을 한 업종이었다. 그 덕에 별다른 시행착오 없이 공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유지정도가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기반이 탄탄해지면서 성장에 탄력이 붙자 이익도 쏠쏠했다.

1656년, 부친의 부름으로 제재공장 문 닫아.
4년 동안 큰돈을 벌게 해준 제재공장을 계속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부친 정태성 사장의 부름 때문이었다. 1948년 부친이 설립한 대구합판공장이 잘 되자 정태성 사장은 오랜 숙원이었던 해안가 합판공장설립을 위해 부산 적기동에 대동산업 부지를 사들여 1956년 대구공장을 부산으로 이전했다.
부산으로 합판공장을 이전 확장하자 대구공장에 비해 두배의 인원이 필요했고 이때 둘째아들 정해수 씨를 불렀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부친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던 정해수 씨는 부친의 부름을 받고 기꺼이 제재공장 문을 닫고 성창기업 부산공장으로 부친을 도우러 갔다. 할아버지 정석주 씨가 부친 정태성 씨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던 것처럼 정해수 씨에게도 부친 정태성 씨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특히 다른 형제들에 비해 학교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정해수 씨는 그 때문에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렸다고 생각해서인지 유난히 효심이 강했다. 제재공장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고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충분한 제재공장이었지만, 부친의 부름에 기꺼이 문을 닫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해수 씨는 부산합판공장의 경리과장을 맡았다. 이때는 정해수 씨가 1956년 12월(그의 나이 27세 때) 결혼을 한 직후였다. 이때 정해수 씨의 바로 윗형 정해덕 씨는 부산합판공장의 공장장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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