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창산업 제재공장 Ⅰ

인천에 위치한 선창산업은 합판공장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거대한 자동시설의 제재공장도 운영하고 있다.
선창산업이 거대한 제재공장을 지은 이면에는 MDF공장이 있다. 선창산업은 1995년 MDF공장을 건설하며 MDF사업에 진출했고, 2001년 MDF 제2공장을 건설하고 MDF사업을 확장하면서 원재료공급의 문제에 부딪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창산업은 20 05년 거대한 제재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 그 제재공장으로부터 MDF 원재료의 50%를 공급받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봤을때 선창산업은 합판 매출이 33.3%, MDF 매출이 43.3%, 제재목 매출이 23.4%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창산업의 출발은 연탄공장
선창산업의 창업주 정해수씨(1928년생, 작고)는 부산 성창기업 정태성 사장의 2남으로 부친의 뜻에 따라 부친의 회사에서 경리과장 및 서울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정해수 씨는 부친의 뜻에 따라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1956년 12월 결혼 후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결혼도 한만큼 앞날을 스스로 책임져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1959년 10월, 부친의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 답십리에서 연탄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정해수 사장의 나이는 32세 때였다.
답십리에 조선연탄주식회사가 쓰던 공장을 매입해서 연탄제조업으로 출발한 것이다. 사업출발 당시에는 연탄제조업은 순조로웠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공장을 쉴 새 없이 돌려야 했다.
그러나 연탄산업의 사양화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1966년 겨울, 극심한 연탄파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에너지구조의 무게중심을 석유로 옮기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석유가 전체에너지의 37%를 차지함으로써 석탄 33%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제원유가격은 베럴당 2달러 정도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정해수 사장은 연탄산업이 침체현상을 보이자 새로운 사업진출을 모색했다.

1967년, 합판공장 가동
선창산업 정해수 사장(당시 그의 40세)은 답십리 연탄공장자리에 합판공장과 제재공장을 짓고 1967년 5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당시 선창산업 답십리 합판공장 인원은 300명 정도였고, 하루 생산량은 2만매 정도였다.

1969년 6월, 후로링 공장 가동
합판공장에는 부수적으로 조그만 제재공장을 갖기 마련이다. 부적재가 나오면 제재를 해서 포장재로도 사용하고 판매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창산업 정해수 사장은 합판공장이 잘되자 제재공장을 확장해서 후로링(floo ring)공장을 지었다. 1969년 6월 가동을 시작한 후로링 공장은 합판생산에 치우쳐있는 생산제품을 더욱 다양화 했다.
1971년 6월에는 후로링 보드 KS마크(KSF 3103호)를 획득해 후로링 보드의 품질을 공식적으로 인정 받았다.

1971년, 인천으로 공장이전
선창산업 정해수 사장은 답십리에 위치한 합판공장이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수출합판의 선적 및 수입원목의 운반이 편리한 곳을 찾아 나섰다. 정해수 사장은 답십리에 합판공장을 지을 때부터 인천이 합판공장으로써는 적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당시는 인천의 땅값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1971년 정해수 사장은 인천 월미도 인근의 2만평 가량의 부지를 마련했다. 정해수 사장이 인천에 부지를 마련 하는데는 선광공사 심명구 사장(작고)의 도움이 컸다. 선창산업이 구입한 인천 월미도 부지는 원래 바다였던 곳을 선광공사에서 매립한 땅이었는데 심명구 사장은 좋은 조건으로 선창산업 정해수 사장에게 넘긴 것이다. 이때가 1971년 2월이었다. 1970년대 항구도시 인천은 서울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항만업 중심도시에서 무역공업 등 여타산업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고 있을 때였다.
1971년 2월, 선창산업 합판공장을 지을 부지를 살피러 인천으로 간 정해수 사장(당시 44세)은 시원하게 펼쳐진 벌판에 바닷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소금기와 비린내가 섞인듯한 내음이 얼굴에 와 닿을 때 이곳이 합판공장을 이전할 최적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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