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산업 Ⅶ

창업주 이경호 회장

이경호 회장(1931년생, 서울 출생)은 한달에 파푸아뉴기니를 몇번씩 오가며 파푸아뉴기니산 원목을 한국의 합판회사들에게 오퍼했다. 주로 부산지역에 있는 동명목재, 성창기업, 광명목재 등에 오퍼해서 팔았다.
당시 배 1척을(6000㎥ 정도) 오퍼해서 팔면 1㎥당 1달러씩 쳐서 6000달러(당시 환율 400원 정도)를 받았다. 잘 될 때는 1년에 60배를 오퍼하기도 했다. 3년간 오퍼업을 했더니 돈도 많이 생겼다.
이경호 회장은 1978년 원목 오퍼업을 그만두고 인천 가좌동에 제재소를 차렸다. 원목 오퍼업을 해서 번 돈으로 제재소를 하나 차리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재소 이름도 오퍼상을 할 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해 ‘경민산업’이라고 했다. 남들이 당시 돈 3천만원으로 제재소를 차릴 때였는데, 이경호 회장은 큰 맘 먹고 1억원이나 되는 자동제재기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설치했다. 디지털캘리퍼스가 달린 제재기였다. 주위에서는 미친짓을 하느냐며 곧 망할 것이라고 핀잔을 줬다. 하지만 경민산업은 이 제재기를 들여놓음으로써 50명이나 되는 직원을 12명으로 줄일 수 있었다. 12명의 직원만으로 회사를 운영하다보니 우선 인건비가 적게 들었다. 뿐만 아니라 1980년 들어서면서부터 각 직장에 노사분규가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다른 제재소들은 임금인상요구 등 노사분규로 애를 많이 먹을 때 이경호 회장은 단촐한 인원이라 노사분규 없이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미송 제재목, 일본으로 수출하다
이경호 회장(경민산업 대표)은 일본에 미송 제재목을 많이 수출했다. 자동제재기로 제재를 하기 때문에 치수에 민감한 일본 바이어들에게 호응을 얻어 주문도 많이 받았다.
제재소를 운영한지 15년이 돼가는 1993년부터는 일본으로부터 미송 제재목 주문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경호 회장은 이탈리아로부터 집성재 제조기를 수입해 설치하고 영창악기에 피아노다리 프레임을 만들어 납품했다.

구조용 집성재 제조에 나서다
199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구조용 집성재 자동 접착기계를 수입·설치하고 한국 최초로 구조용 집성재 제조에 나섰다. 1997년에는 기술표준원의 목재전문위원으로 위촉돼 KSF3021 구조용 집성재 제조기준을 제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9년에 경민산업은 한국표준협회로부터 KS표시 인증을 획득했다.

한국목조건축협회 회장직을 맡다
2002년에는 한국목조건축협회 회장을 맡아 창립한지 6년동안 지지부진하던 협회를 재정비하고, 회원사가 13개밖에 안되던 것을 56개의 정회원사와 준회원사를 100여개로 늘려 명실공히 산림청 산하 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도록 했다. 산림청 목재이용과와 협조해 수입재에 의존하던 2×4공업 목조주택에 국산재를 사용하는데 기여했다.
2005년부터는 국산 낙엽송 간벌재를 이용한 구조용 집성재 제조기술을 개발해 국산재 활용에 크게 기여했다. 그동안 제대로 활용가치가 없었던 낙엽송 간벌재를 구조용 집성재로 만들어 활용케 함으로써 산림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도 수익성이 있게 했으며, 그 돈으로 계획적인 간벌을 하도록 해 건강한 숲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원래 국산 낙엽송은 간벌을 많이 해줘야 하는데 간벌된 소경재는 결점이 많아 목재로써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경호 회장은 그 쓸모없는 간벌재를 사들여 구조용 집성재를 만들었으며 매년 3,000㎥이상의 간벌재를 사용했다. 2004년에 이경호 회장은 구조용 집성재의 내화성능 인정을 받기위해 관계(관공서), 학계를 뛰어다니며 노력했다. 그 결과 2005년 건기연(건설기술연구원)으로부터 구조용 집성재의 내화성능 인정서를 받아냈다. 이로써 목조건축의 다층화(2~4층)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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