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물산 Ⅴ

대성목재 백영배 본부장
백영배 본부장은 1978년 당시 작은 회사의 본부장이었지만 후일 재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분이기에 간단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백영배 본부장(1945년생, 서울출생, 2012년 작고)은 1963년 덕수상고(당시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지금도 연세대 상대를 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당시(1963년) 야간상고였던 덕수상고를 졸업해 연세대 상대에 입학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1967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효성그룹 동양나일론 공채 1기로 입사했다. 당시 효성그룹의 오너 조홍제 회장의 첫째 아들 조석래 씨(현 효성그룹 회장)도 외국 공부를 마치고 동양나일론 공채 1기로 입사했다.
회장 아들과 입사동기의 처지가 된 것도 남다른 일인데, 더구나 동양나일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한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가 됐다.
그런 연유로 대리 진급과 과장 진급이 남들보다 빠르게 되는데 도움이 됐다는 얘기를 백영배 본부장(후일 효성물산 사장, 나산실업 사장역임)으로부터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후 본부장 진급과 이사 진급, 상무를 거치지 않고 전무로 진급하는 과정에서는 본인의 능력이 적극 반영됐다고 본다.
이사 진급, 전무 진급, 부사장까지의 진급이 모두 대성목재에 재직중에 일어났다. 1991년 동양나일론 사장으로 임명된 것도 장기불황으로 부진에 빠진 동양나일론(효성그룹의 주력기업)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효성그룹 공채 1기 출신으로 효성그룹 계열사 사장이 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나산실업 사장에 발탁
나산실업은 1999년 6월 백영배 사장(효성물산 출신)을 대표로 맞이했다. 1967년 효성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해 30년 넘게 효성그룹에서 일한 효성물산 백영배 사장을 나산실업 사장으로 맞이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의 황소 같은 뚝심과 공격경영이 한 몫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영배 사장은 서글서글한 성격에 굵고 힘있는 목소리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말단시절부터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이란 좌우명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결과는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선배의 등을 보고 배운다’는 일본 속담을 명심하고 일을 했다. 모시던 상사를 보며 느낀점을 노트에 적는 것을 습관화했다.
‘저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식의 메모 습관은 후일 그것이 본인의 리더쉽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 백영배 본부장을 얘기하면서 나산실업사장 시절 탤런트 이병헌과의 훈훈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백영배 사장이 나산실업 사장으로 간지 채 1년이 안된 2000년 5월의 일이다. 백영배 사장은 나산실업 사장으로 와서 나산실업 광고모델 이병헌 씨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병헌 씨는 나산에서 만드는 남성 신사복 ‘트루젠’의 광고 모델이었는데 1998년 나산실업이 부도가 나면서 나산실업의 여러 광고모델이 떠나갔지만 이병헌 씨는 “내가 모델을 한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 해서 떠나면 도리가 아니다”라며 모델료를 받지 않고 계속 무료 모델을 했다고 한다.
“그 친구 참 괜찮은 젊은이더군요. 그 사실을 보고받고 놀랐지요. 2000년 5월, 지원팀에서 이병헌과 재계약을 해야 하는데 얼마를 줘야할지 모르겠다며 나한테 물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줬던 친군데 이제 먹고 살만하니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달라는 대로 주라’고 했어요. 계약서의 모델료란을 비워놓고 이병헌 씨에게 위임했는데 이것이 백지수표 운운하면서 알려져서 화제가 되기도 했죠. 그 친구 간이 작아서인지 얼마 쓰지도 못했더군요”.

효성물산, 요트사업에도 참여
효성물산은 1979년 5월, 인천에 요트공장 생산설비를 완공하고 본격적인 요트생산에 들어갔다. 연간 60척 규모의 생산설비가 완료되자 1979년 5월 8일, 관계자와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제1호 요트 진수식도 거행했다.
제1호 요트는 전장 35피트, 중량 8.4톤, 시속 12노트의 6인승으로 미국 MPI社와 척당 4만 달러에 수출 계약을 했다. 효성물산은 미국 MPI社에 요트 200척을 수출키로 계약하고, 우선 1979년도에 100척을 선적키로 했다.
효성물산은 고급 요트를 생산할 계획도 했는데 내장 디자인을 더욱 고급화하는 한편 시속도 25노트로 높일 계획이며 척당 8~10만 달러를 받을 것으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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