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물산 Ⅳ

인수팀, 해외지점 순방
1978년 7월20일 경으로 생각된다. 효성물산 인수팀 중 박원규 영업상무와 백영배 무역본부장 두 명이 드디어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타와우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나 홍콩지점에서 3일, 말레이시아 산다칸 지점에서 3일을 보내고 한국을 출발한지 일주일 만에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타와우에 도착한 것이다.
필자는 인수팀과 함께 당시 원목수출회사로는 가장 큰 회사로서 대성목재가 한달에 약 6채의 선박물량을 공급받는 합생(Hapseng)이라는 회사를 방문했다. 당시 합생(타와우 소재)의 전무인 C.K.Lau(씨케이 라오, 합생 대표이사의 조카)를 만났었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그동안 원목을 공급해줘서 고맙다는 말 등 쌍방의 회사 사정을 얘기한 뒤, 점심시간이 되자 씨케이 라오는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씨케이 라오는 그동안 서울을 떠나 홍콩을 거쳐오면서 중국 음식을 많이 먹었을테니 오늘은 말레이시아 음식을 먹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다. 씨케이 라오는 호텔이 아닌 말레이시아 현지주민들이 즐겨찾는 칸막이도 없는 음식점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 안에 있는 빈대떡집, 칼국수집, 순대국집 같은 곳인데 말레이시아에 가본 분이라면 잘 알겠지만 손님을 접대하는 곳은 아니고 현지 주민들이 미고랭, 나시고랭 등으로 한 끼 식사를 주로 하는 곳이다.
당시 필자는 4년째 그곳에 살고 있을때라 낯설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홍콩을 거쳐 갓 출장 온 박원규 상무와 백영배 본부장에게는 젓가락이 잘 가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필자도 말레이시아에 처음 왔을 때 말레이시아 음식의 그 독특한 향이 낯설어 잘 먹지 못한 경험이 있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필자의 집에서 칼국수 대접
다음날 점심시간의 약속이 비어 필자의 집에서 점심을 대접하기로 했다. 며칠 전 해변에서 부인과 직접 잡은 바지락과 조개를 넣고 칼국수를 끓여 대접했다. 반찬이라야 미리 담궈 놓았던 열무김치 뿐 이었다.
해외살림하면서 끓인 칼국수이니 별 맛이 있겠냐마는 백영배 본부장은 귀국 후에 필자를 만날 때마다 그때 그 칼국수 맛을 못잊는다고 했다. 서울을 떠나 홍콩에서 3일, 산다칸에서 3일을 보내고 익숙치 않은 말레이시아 음식으로 보낸터라 김치 생각이 절실히 날 때에 열무김치와 칼국수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백영배 본부장은 당시 원목 수입 분야를 담당했는데 그 후 빠른 속도로 해외분야 업무를 파악해서 1년만에 이사로 승진했고 당시 쉴새없이 치솟는 원목 가격에 대해 어떻게 하면 원가를 줄여 이익을 남길 수 있을까 고심했다.

1978년, 대성목재도 사라왁 원목수입
1978년 9월, 대성목재도 원가를 줄이기 위해 사바산(Sabah) 보다 값이 싼 사라왁산 원목을 사용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백영배 본부장은 필자에게 사라왁산 원목을 사러 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필자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갑자기 평균 재적이 작은 원목을 수입해 공장에 투입하면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고 생산 부진의 원인을 전적으로 사라왁 원목으로 돌리고 이런 나무를 구입한 사람을 문책하라며 난리가 날 것이다. 따라서 먼저 생산 측의 동의를 얻어야 공장 측의 원망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건의했다. 여기서 백영배 본부장의 기지가 발휘된다. 당시 대성목재 생산부장은 육사 중퇴출신 최 부장이었는데 술을 대단히 좋아하는 분이었다.
백영배 본부장은 최 부장을 불렀다.
“최 부장, 지금 사바 원목과 인도네시아 원목이 질은 좋지만 자꾸만 가격이 올라 회사 수익이 나질 않으니, 사라왁 나무가 싸다고 하는데 사라왁 원목을 쓰는 게 어떻겠소?”하고 의중을 떠보면서 사라왁에 나와 같이 가서 나무를 보고 오자고 제의했다.
사라왁에 가는 도중 최 부장과 홍콩에 들린 백영배 본부장은 홍콩에서 유명한 술집을 찾았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 분이라 해외에서의 술, 그것도 홍콩에서의 아리따운 아가씨와의 술맛을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나하게 술 접대를 받고 다음날 사라왁에 도착해 사라왁 원목을 본 최부장은 원목의 품질여하를 떠나 OK라고 대답했다.
드디어 사라왁 원목이 대성목재 만석동 공장에 도착했다. 평균재적이 적은 사라왁 원목이 공장에 투입되기 시작됐다. 생산량이 뚝 떨어지고, 수율도 떨어지고, 불량률도 늘어났다.
당시 홍상무가 생산상무였는데, 자기 수하에 있는 생산부장이 직접 사라왁에 가서 나무를 보고 사온 것이라 어디에 하소연도 못하고 쩔쩔매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대성목재는 평균재적이 적은 원목을 사용하는데 숙달되는 계기가 됐으니, 회사 전체로 보면 원가 절감하는데 도움이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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