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원목 수입의 선두주자, 효성물산

효성물산이라고 하면 섬유산업의 대표주자, 동양나일론, 70~80년대 재계서열 4위 등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효성물산은 원목 수입판매에도 앞장서며 제재소들의 원자재인 칠레송 원목수입의 선두주자로도 알려져 있다.
효성물산은 일찍이 197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칠레송을 수입해 국내 제재소들에게 판매를 했다. 인천의 연안부두 입구 사거리 100주년기념탑(지금은 없어졌다)에서 남항쪽으로 1㎞쯤 가면 왼쪽으로 1만 여평의 원목타장이 있었다. 효성물산은 이 원목타장에 칠레로부터 수입한 원목(라디에타파인)을 쌓아놓고 인천 등 여러 제재소들에게 판매를 했다. 당시 인천 타장 소장에는 송병호 씨(후일 (주)대중 이사 역임)가 맡아서 했다.
당시 칠레 원목수입 실무 담당자였던 송영남 씨(1980년 효성물산 입사, 한국외국어대학 경제학과 졸, 現팀버랜드 대표, 뉴질랜드 TPT社 에이전트)를 만나 당시의 얘기를 들어봤다.

1979년, 칠레 원목 첫 수입
효성물산은 1975년부터 사내에 목재사업부를 두고 칠레송 원목 수입뿐 아니라 남양재 원목 수입, 미송 제재목 수출 업무를 했다. 1976년에는 종합무역상사 지정을 받았으며 1979년 칠레 원목 첫 배를 들여왔다. 당시는 우리나라 목재 소비량이 지금보다 두 배나 많을 때였고, 제재소의 숫자도 지금보다 다섯배나 많을 때였다. 당시는 목재수입 판매업이 돈이 되는 시절이었다. 재계 서열 1,2위인 현대, 삼성도 목재 수입을 했으니 말이다.
지금은 부동산 경기가 좋지않아 건설업이 잘 되지 않고, 건설경기가 부진하니 원목 수입판매업도 잘 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동산 중개업이 잘 되지 않고, 이사짐 센터가 망하는 곳이 많으며 도배업, 싱크대업, 인테리어업이 잘 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칠레 원목은 선적 후 40~45일이 지나야 인천항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그 먼 거리에서 원목을 수입하려면 선박운임(freight)이 비싸서 장사가 안될 것 같았지만, 당시 효성은 칠레에서 공선을 잡아 운임을 반값에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장사였다. 당시 칠레원목은 CNF 55$에 수입됐는데 원목값은 40$이었고 선박운임은 15$이었다.
1985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뉴질랜드산 원목보다 칠레산 원목이 더 많이 수입됐다. 1980년에는 칠레산 원목이 30만㎥가 수입됐으나 뉴질랜드산 원목은 고작 10만㎥ 수입됐다.
1982년에는 뉴질랜드 산림청 관계자들이 한국에 와서 조선호텔에서 세미나를 열고 샘플을 나눠주며 제발 뉴질랜드 원목을 사달라고 홍보를 했다.
뉴질랜드산 원목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칠레산 원목보다 더 많이 수입되기 시작했으며 1994년부터는 대성목재, 선창산업, 성창기업, 이건산업 등 합판회사들이 뉴질랜드산 원목으로 합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칠레산 원목보다 두 배나 많은 양이 수입됐다.
1989년 칠레 원목이 45만㎥가 수입됐고, 뉴질랜드산 원목은 64만㎥가 수입됐다. 1990년에는 칠레 원목이 58㎥, 뉴질랜드산 원목은 125만㎥가 수입됨으로써 칠레산 원목 수입양의 두 배를 넘겼다. IMF 직전인 1997년에는 칠레산 원목이 146만㎥가 수입됐고, 뉴질랜드 원목은 345만㎥가 수입돼 칠레산 원목 수입양의 2.5배를 기록했다.

미송제재목 수출
국내 제재소에 칠레산 원목을 수입·판매해 제재산업 발전에 기여한 효성물산은 처음부터 국내 목재산업에 많은 관심을 뒀다. 효성물산은 1980부터 목재 사업부를 두고, 남양재 수입과 미송 제재목을 수출했다. 미송 제재목은 효성물산 자체 제재소인 효성제재소(인천시 도화동 소재)에서 제재를 하기도 했지만, 주로 삼미사가 제재한 미송 제재목을 받아 일본에 수출했다. 당시 미송 제재목 수출은 최원명 씨(現 우드웰코리아 대표)가 주로 맡아서 했는데 최원명 씨는 후일 효성물산 동경주재원도 역임했다.
효성물산은 남양재도 수입해서 제재도 하고 원목으로 판매도 했는데, 남양재 수입담당에는 장진성 씨, 박원식 씨, 이재우 씨 등이 맡아서 했다. 이재우 씨는 남양재 원목 판매업무를 주로 했는데, 어느날 원목 판매대금을 수금하고 날이 어두워 여관에서 숙박을 하던중 수금한 어음 모두를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이 일은 당시 인천에서 큰 화제가 됐었다.

1980년, 환차손을 크게 보다
1979년의 제 2차 오일쇼크로 1979년 1월부터 세계 각국의 원목가격이 대폭 인상됐다.
뿐만 아니라 환율도 급등했다. 1978년 우리나라 환율이 428원 정도였는데 1979년 봄 환율이 480대로 급등했다. 효성물산은 이때 환차손으로 큰 손해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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