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종합목재 Ⅳ

1996년, 적자탈출 총력
1992년 정주영 회장의 대통령 선거 패배, 음용기 사장의 구속 등으로 대선 다음해인 1993년은 현대종합목재에게는 어려운 한 해였다. 그러던 것이 1994년부터는 적자를 보기 시작했다.
현대종합목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따가웠고, 국내 판매도 잘 안될 뿐 아니라 수출도 제 몫을 해내지 못했다. 1994년부터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완전 자본잠식위기에 처한 현대종합목재는 1996년 울산의 여천공장부지 등 보유 부동산 및 유가증권 처분을 적극 추진하는 등 적자탈피를 위한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우선 울산 여천 공장부지 7000평과 인천 송도 원목장 15,000평을 매각하기로 했다. 여천 공장부지는 장부가가 11억원인데 시가는 약 49억원을 호가하고 있어 매각할 경우 38억원의 차익이 기대됐다. 인천 송도 원목장도 매각시 82억원의 차익이 기대됐다. 현대산업개발 주식 41만주도 매각했다. 주당 취득가격이 2900원이었는데 상장 후 가격이 2만원대를 넘어섰기 때문에 70~100억원 가량의 차익이 발생했다.

1998년 상호를 ‘현대 리바트’로 개명
현대종합목재(대표 음용기)는 1998년 1월 1일부로 현대종합목재의 상호를 ‘현대 리바트’로 개명했다. 음용기 사장은 그 동안 표준화가 되고 있지 않아 많은 불편을 겪었던 창호 표준화 작업에 착수했다. 건설업체마다 건축자재의 기준과 규격이 달라 자재 제작 업체들은 납기가 지연되는 수가 다반사였고, 건설업체들은 납기를 제때 받지못해 공기가 연장되는 경우도 많았다. 음용기 사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차적으로 창호 표준안을 마련했다.

1998년 4월, 울산합판공장 정리
현대 리바트 음용기 사장은 1998년 4월 울산합판공장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합판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이다. 1993년 이후 1997년까지 477억원의 적자가 누적됐고 앞으로도 수지가 개선될 전망이 보이지 않아 합판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합판 라인 근로자 150명에게 희망퇴직을 접수해 인력을 정리했고 공장설비는 해외에 매각할 계획을 세웠다. 1997년만해도 합판 매출이 250억원에 불과했지만 적자는 91억원에 달했다. 현대리바트는 합판사업을 정리하는 대신 가구 및 실내장식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방침이었다.

1998년 5월, 기업퇴출 명령을 받다
IMF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 정부의 금융감독위원회는 1998년 5월,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들에게 퇴출명령을 내렸다. 퇴출기업 대상에는 5대 재벌그룹 계열사 20개 업체도 포함돼 있었다. 삼성그룹 계열사 4개 업체도 포함돼 있었고, 현대그룹에는 ‘현대리바트(전 현대종합목재)’를 포함 4개 기업이 퇴출대상으로 선정됐다.
당시 현대 리바트의 종업원 수는 926명이었고, 97년도 매출액은 5,146억이었고 1997년도 재무상태는 자산 3,906억원(고정자산 1,419억원), 부채 4,161억원이었다. 실적만 나쁜게 아니었다. 증권거래소에서도 빠지게 되고 영업구조도 나빴다. 모기업인 현대건설과 현대산업개발이 짓고 있는 아파트에 가구를 납품하는 비중이 80%였고, 시중판매는 20%도 안됐다. 울산의 가구공장에서는 파업도 끊이지 않았다. 해마다 10%씩 임금을 올려줬기 때문에 퇴출 무렵엔 1인당 임금이 가구업계 평균보다 30% 정도 높았다.

1998년 5월, 음용기 사장 사퇴
정리해고와 관련한 노사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현대 리바트의 음용기 사장은 1998년 5월 20일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정리해고와 관련해 대기업 사장이 퇴진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현대 리바트(주)는 98년 5월 23일 이사회를 열고 음용기 사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에 변태성 현대전자 부사장을 현대 리바트의 사장으로 선임했다. 음용기 사장은 현대 중공업 자문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