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고병옥 사장 체재 출범
한국합판은 1981년 4월 창업주인 고판남 사장(당시 64세)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세대제지의 부사장인 고병옥 씨를 사장으로 취임시키면서 경영체재를 바꿨다. 고병옥 신임사장은 창업주 고판남 회장의 외아들로 이 때부터 2세 경영체재로 돌입했다. 고판남 회장이 주력업종인 세대제지의 경영을 아들에게 맡긴 것은 고령 때문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모기업인 한국합판이 여러 업체의 사업체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룹 총수로서의 역할이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랫동안 경영수업을 해 온 아들이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췄다고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고판남 회장이 1981년 실시된 제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서 정계에 진출하려 했던 것도 아들에게 경영을 맡긴 또 하나의 이유였다.

2세 경영주, 고병옥 사장
신임 고병옥 사장(1936년생)은 서울대 공대 화공과 출신으로 1961년 12월 그의 나의 26세때 부친인 고판남 회장이 경영하는 배달산업주식회사(성냥제조공장)에 취체역(감독관 역할)으로 근무하면서 그때부터 부친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배달산업은 1953년 고판남 회장(그의 나이 42세 때)이 군산에 설립한 성냥제조회사로 사업이 성공하자 10년 후인 1963년 고판남 회장은 군산에 ‘한국합판’이라는 합판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때에도 고병옥 사장은 한국합판의 감사를 맡았었고, 상무이사를 거쳐 1968년 1월에는 전무이사로 승진해 부친을 도왔다.
1978년 4월, 고병옥 사장(그의 나이 43세 때)은 한국합판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한국합판의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고병옥 사장은 한국합판을 직접 운영하면서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했고 기술개발과 경영합리화를 시도했다. 1980년 당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원목 수출국이 자원보호정책을 추진하면서 합판수출 경쟁력이 급속히 악화되자 한국합판의 1일 생산량 8만 매 규모를 과감히 2만5천 매 규모로 줄이고 후로링보드 생산에 전력을 기울여 1987년에는 조달청에 후로링보드를 납품하기도 했다. 고병옥 사장의 진가는 세대제지 부사장 시절에도 발휘됐다. 1973년 한국합판이 고려제지를 인수해서 회사명을 세대제지로 바꾼 제지회사의 부사장으로 취임해서 그 당시 기업가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는데, 옛 고려제지의 종업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줬고, 기술진을 독려해서 제 3호 초지기가 짧은 시일 내에 조립이 완공되도록 했다. 이어서 N-1호 초지기를 도입 증설해 종이생산 능력면에서 동종업계인 전주제지와 쌍벽을 이루게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병옥 신임사장은 부사장 시절에 이미 제지업계의 2세 경영자 중 가장 먼저 입지를 다졌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세대제지 생산능력 증대에 결정적 역할
특히 세대제지 생산능력 증대에 결정적 역할을 한 N-1호 초지기 도입과 관련해 일각에서 제기한 비판에 대해서도 적극 해명에 나서며 신문용지업계의 자부심을 내비쳤다. 세대제지가 최신예기로 자랑하는 N-1호 초지기는 이미 컴퓨터제어 방식을 채택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그리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며, 연간 생산능력을 9만톤이라고 내세운 것 역시 지나친 과장이라는 동종업계의 시각에 대해 고병옥 사장은 “N-1호 초지기는 분당 900m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는 새로운 기계이기 때문에 종이 수요가 늘어날 경우 하루 300톤 이상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기계”라고 반박했다.
하루 250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가진 N-1 초지기가 종이 수요가 증가할 경우 300톤까지 생산할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당시 주간 매경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해 1980년 4월 11일 기사를 통해 ‘N-1호 초지기는 스피드 업이 가능한 최신예 초지기’라고 보도해 고병옥 사장의 발언을 뒷받침해 주기도 했다.
이처럼 탁월한 경영능력을 가진 고병옥 씨가 세대제지의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제2차 유류파동, 정부의 긴축정책실시, 10.26사건 등 정국의 혼미상태, 사회불안 등으로 내수경기가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 적절한 등장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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