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세풍(世豊) Ⅲ

1985년 주식회사 세풍 발족
한국합판(대표 고판남)은 1985년 8월 세대제지를 흡수·합병하고 회사 명칭을 주식회사 세풍으로 바꿨다. 합판과 제지는 업종이 다름에도 한 회사로 합병됐기 때문에 세풍은 합판 사업부와 제지 사업부 두 개의 본부를 두고 각각 합판 사업과 제지 사업을 관장하게 했다.

고판남 회장은 합병의 이유로 ‘산업 합리화’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제 그 내막에는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다. 합판 산업이 198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히 사양화되기 시작하자 합판의 감산을 위한 포석으로 합병을 한 것이다.

한때 국내 최대 수출품목으로 세계 제 1위의 수출실적을 기록했던 합판 산업은 1980년부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원목 수출국이 자원보호정책을 강행하면서 수출 경쟁력이 급속히 악화된 반면 세대제지는 초지기 조립을 추진하면서 연간 생산능력이 16만2000톤으로 늘어나면서 내수는 물론 수출까지 활발해지자 제지산업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보고 그룹을 지탱해 주는 핵심기업을 세대제지로 하기 위해 합병을 택한 것이다. 세풍은 전력을 가다듬고 제지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한국합판은 일일 8만장 생산에서 일일 2만5천생산으로 과감히 축소하고, 후로링 보드 생산에 주력했다.

창업주, 고판남 회장
세풍의 창업주 고판남 회장(호는 경암(耕岩))은 1912년 전북 옥구군 성산면 도암리 세곡부락에서 태어났다. 1929년 군산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졸업 당시 성적이 우수해서 도지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30년 2년제 군산상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5월 그의 나이 19세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무역회사이자 양곡도정상인 화강정미소에 입사해서 11년간 경리직에 근무했다. 상업보습학교에서 상업에 관한 기초이론을 배운 그는 화강정미소에 근무하면서 상업의 진리를 터득했고 사업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었다.

1941년 그의 나이 30세 때 군산에서 삼남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사업가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정미업에서 밑천을 마련한 고판남 회장은 1945년에는 전북수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산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 해 9월 그의 나이 34세 때에는 군산에 있는 청구목림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며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기도 했다.

소규모 목재 회사 ‘배달산업’ 창립
그로부터 8년 뒤인 1953년(그의 나이 42세 때) 소규모 목재회사인 ‘배달산업(성냥제조공장)’을 창립하면서 목재와 첫 인연을 맺었다. 성냥공장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자 1963년(그의 나이 52세 때)에는 ‘한국합판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합판 업계에 진출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합판 산업의 호황기를 맞아 고판남 회장은 해마다 높은 실적을 올리며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에 정부는 1968년 철탑산업훈장을 수여했고, 1969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1970년에는 합판 업계에서 국내 4위를 기록했다. 사업가로 성공한 고판남 사장은 ▲1967년 군산상공회의소 회장(1967년부터 1991년까지 24년간 역임)을 역임했고 ▲1971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1972년에는 초대국민회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합판 사업으로 큰돈을 번 고판남 회장은 1973년 문을 닫고 있는 고려제지를 인수해 법인명을 ‘세대제지(世代製紙)’로 변경하고 전주제지와 쌍벽을 이루기도 했다. 1975년에는 육성사업에도 힘써 군산제일중고등학교를 인수하고, 개정간호전문대학을 인수해 ‘세대문화재단’을 설립했다. 1981년에는 제11대 국회의원(군산 옥구지역)으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고판남 회장의 정계 진출
1985년에는 합판 산업이 사양화되자 ‘한국합판’과 ‘세대제지’를 합병해서 주식회사 세풍(世豊)을 탄생시켰다. 그 후에도 호남잠사, 한국임업, 한국견적, 세대건설, 내장산관광호텔, 영진주철 등을 인수하면서 세풍그룹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998년 4월 28일 고판남 회장은 삼성의료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향년 8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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