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세풍(世豊) Ⅱ

1976년, 제지 생산량 6만톤으로 늘려
재무부의 특별한 배려로 고려제지를 인수한 한국합판(대표 고판남)은 고려제지 종업원들의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정산해주고 각자로부터 다시 입사원서를 받아 새로 채용하는 형식으로 고용승계를 하면서 명실상부한 고려제지의 새 주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고려제지를 인수한 후 회사이름을 세대제지로 바꾼 고판남 회장은 제지공장에 필요한 관리직 및 현장 기술직의 책임자들을 임명하는 과정에서도 외부에서 영입하거나 스카우트하지 않고 고려제지에서 직책을 수행했던 사람들을 최대한 유지토록 배려했다.
세대제지는 2달간의 보수작업을 거쳐 1973년 5월부터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이로써 고려제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국 합판계열의 세대제지 주식회사가 들어섰다. 하지만 국내 30%의 생산량을 자랑했던 고려제지의 옛 위상을 되찾을 수 없었다. 1년간 조업중단의 영향으로 인해 가동율이 떨어지면서 국내 점유율 17%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세대제지는 대대적인 시설보수로 연간 생산능력 2만톤을 회복했지만 고려제지 군산공장이 문을 닫은 사이 연간 생산능력을 6만톤으로 증가시킨 전주제지를 따라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 고려제지가 1968년 대일청구자금 220만불을 획득해 일본으로부터 구입한 초지기가 공장구내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초지기가 생산량 증대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 고판남 회장은 제작사인 일본 I.H.I에서 기술자를 초정해 초지기 조립을 추진했다. 하루 120톤의 생산량을 갖춘 초지기 준공으로 인해 2만톤에 그쳤던 세대제지의 연간 생산능력은 단번에 6만톤으로 증가해 전주제지와 동일한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에 따라 세대제지는 우리나라 신문용지 생산 36%를 차지해 고려제지 시절의 위상을 다시 되찾았다.
 

1977년, 군산의 화성건설 인수
한국합판(대표 고판남)은 1977년 말 군산에 있는 화성건설을 인수해 상호를 세대건설로 변경했다. 고판남 회장은 화성건설을 인수한 후 세대건설의 자본규모를 1억 5000만원으로 늘렸다. 세대건설은 한국합판의 계열사인 호남전기의 제 2공장 건설을 맡았고 세대제지 공장 증설을 맡기도 했다. 1978년 7월에는 자본금을 3억원으로 늘리고 아파트 건설에도 참여했다. 한국합판은 1979년에는 영진주철을 7억원(부채포함)에 인수해 주철관 생산능력을 20만톤에서 30만톤 규모로 늘렸다. 영진주철은 대지 6,500평, 건평 2,000평 규모의 국내 3대 주철 메이커중 하나였다.

1981년, 제 2세 경영주로 전환
1981년 4월 세대제지는 창업주인 고판남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부사장인 고병옥씨(1936년생, 당시 46세)가 사장으로 취임했다. 고병옥 사장은 창업주 고판남 회장의 외아들로서 서울대 공대 화공과를 졸업해 1961년 고판남 회장이 경영하던 배달산업 주식회사에 취체역(감독관역할)으로 근무하면서 그때부터 부친의 사업을 돕기 시작한 아들이었다. 고병옥씨는 한국합판에서 감사와 상무이사를 거쳐 1968년에는 한국합판의 전무이사로 일해 왔다.
1973년에는 고려제지를 인수한 세대제지의 부사장으로 취임해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 경영일선에도 나섰고, 1978년에는 한국합판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한국합판의 경영을 물려받기도 했다. 고판남 회장이 주력 업종인 세대제지의 경영을 아들에게 맡긴 것은 고령으로 인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1981년 고판남 회장은(당시 64세) 모기업인 한국합판이 여러 업종의 기업체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룹 총수로써의 역할이 필요해졌기 때문이었고 또다른 이유로는 고판남 회장이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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