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세풍

㈜세풍의 전신은 ‘한국합판’
㈜세풍은 80년대 전북의 거대한 세풍그룹이었지만 세풍의 전신은 ‘한국합판’이라는 합판회사였다. 한국합판은 1963년 고판남 씨(1912년생, 1998년 4월 28일 작고)가 그의 나이 52세때 설립한 회사로서 합판산업이 한참 성황을 이룰 때 창설돼 한때 전국 합판회사 중 서열 4위까지 오르며 순풍에 돛을 달았다. 1973년에는 고려제지를 인수해 제지업계에도 뛰어들었고 한국임업, 한국견적, 호남잠사, 세대건설, 내장산 관광호텔, 영진주철 등을 인수해 세풍그룹으로 발전해 나갔다.

1987년, ‘세풍’이름으로 후로링 납품
1982년 이후 합판산업이 사양화의 길로 들어서자 한국합판은 합판 생산량을 대폭 줄이고 크루인으로 후로링 보드의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1985년 세대제지(고려제지 인수 후 변경된 이름)를 흡수 합병하며 회사 명칭을 ㈜세풍으로 바꿨다.
1987년 ㈜세풍 이름으로 한국목재공업협동조합이 조달청과 체결한 후로링 보드 단체 수의계약에 참여해 1988년까지 후로링 보드를 조달청에 납품했다.

1953년, 배달산업으로 출발
㈜세풍은 전북의 대표적인 향토기업가 고판남 씨가 설립한 거대한 그룹이었지만 그 출발은 배달산업이라는 소규모의 목재업인 성냥제조공장이었다.
고판남씨는 1953년 그의 나이 42세때 배달산업이라는 성냥공장을 설립함으로써 목재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63년에는 군산에 한국합판이라는 합판회사를 설립했고 미국으로의 합판 수출에도 성공했다.

1973년, 고려제지 인수
고려제지 군산공장은 1972년 8월 이후 조업을 방치한 채 중단되고 있었다. 고려제지를 인수한 조흥은행은 새 경영주를 찾는 작업에 차질을 빚으면서 1년여 동안 고려제지 군산공장을 가동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제지의 조업중단 장기화는 종업원들 문제뿐 아니라 신문용지 수급 불균형이라는 부작용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 전주제지가 생산량을 계속 증가시켜 나갔지만 고려제지 군산공장의 생산량까지 충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전국의 신문용지 생산시설 용량은 11만 7000천톤으로 전주제지가 50%를 차지한 반면 고려제지는 30%선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조흥은행은 고려제지 군산공장을 실경영자에게 넘겨주기 위한 공매입찰을 1973년 2월 20일 실시했다.
이에 앞서 주관부서인 재무부에서는 한국합판(대표 고판남)과 대한교육보험, 전주제지 3개 업체에 입찰 자격을 주고 지명경쟁 입찰을 시켰다. 이날 열린 공매입찰 결과 37억 7000만원으로 입찰한 한국한판이 고려제지 군산공장의 새 주인이 됐다.
입찰 전부터 고려제지는 타도 사람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것이 전북 지역도민의 간절한 바람이요, 요구였다. 전북의 향토기업가 고판남 사장에게 고려제지가 인수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고려제지가 도산 폐업한 후 실직상태에 있던 종업원들이 고려제지를 전북기업인에게 줄 것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단체를 조직해서 관계당국과 교섭을 벌였다는 뒷소문도 전해지고 있다. 사실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재무부가 지역여론을 받아들여 전북의 대표적 토착 기업인 한국합판에게 고려제지가 넘겨지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뒷소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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