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대한특수목재

인천의 대한특수목재는 국제 상사에 근무했던 이범수씨(1951년생)가 1989년 1월(그의 나이 39세때)에 설립한 남양재를 제재하는 제재소다. 설립초기에는 라왕을 주로 제재했고 주로 학교, 체육관 등에 납품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라왕 제재목의 수입이 늘어나자 수입이 불가능한 규격의 라왕을 주로 제재했다. 2008년부터는 라왕 원목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동남아산 특수목으로 조경재를 제재하기도 했다.

대한특수목재, 이범수 대표
대한특수목재 이범수 대표(1951년생, 현 62세)는 서울 출신으로 경희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에 입학했다(70학번).
1977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율산실업에 입사해 수출입 업무를 담당했다. 이범수씨는 남양재 수입뿐 아니라 중동지역으로 합판 수출 및 미송제재목 수출 업무도 했는데(월 300만 달러 수출) 수출이 잘되자 1978년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에 파견됐다.

그러나 세상을 놀라게 했던 율산실업(재계30대 재벌로 등장)의 붕괴로 1년만인 1979년 4월 귀국했다. 그렇게 잘나가던 율산실업(대표 신선호, 부완혁씨의 사위)의 무리한 사업 확장이 화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당시 정부의 금융긴축정책이 강화되자 극도의 자금난에 몰렸고 당시 증권거래소는 1979년 4월 7일 자로 율산실업의 주식매매거래를 중단시켰다.

국내 최초 소련산 원목 수입의 당사자
갑작스런 회사의 부도로 급히 귀국한 이범수씨는 1979년 10월 국제상사에 입사해서 역시 원목 수입 업무를 했다. 이범수씨는 국내 최초로 구소련(현 러시아)으로부터 낙엽송 및 아스판원목을 수입한 당사자다.
1979년 당시는 소련과는 국교가 안 된 상태라 직접거래는 엄두도 못 낼 때였다. 처음 일 년은 일본상사를 통해 소련산 원목을 수입했으며 그다음부터는 스웨덴 교포를 통해 소련산 원목을 수입했다. 스웨덴 교포가 직접 소련에 들어가서 오퍼도 받아오고 그가 직접 검목도 했다.
L/C도 스웨덴으로 열었다. 아스판 (Aspan, 포플러나무의 소련명) 원목은 당시 동해펄프 여영동 부장의 수입의뢰를 받고 수입대행을 해준 것이다. 국내 최초로 수입된 소련산 아스판은 펄프재로 사용하기는 아까울정도로 직경이 큰 원목들이 많아 한양합판, 현대종합목재 등에 판매해 큰 이익을 보기도 했다.
당시 국내 포플라는 거의 고갈된 상태라 이쑤시개 공장, 성냥공장 등에서도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국제 상사는 당시 소련산 낙엽송 원목도 많이 수입했는데 낙엽송원목은 전주에 있는 대한특수목재가 주로 수입의뢰를 했으며 대한특수목재는 이 낙엽송으로 주로 후로링 보드를 만들었다.

전주(全州) 대한특수목재에 동업으로 참여
전주의 대한특수목재(대표 김한태)에 소련산 낙엽송을 수입대행해준 인연으로 인해 이범수씨는 1983년 국제상사를 퇴사하고 전주대한특수목재에 지분을 갖고 동업으로 참여했다.

1989년 인천 대한특수목재 설립
이범수씨는 1989년 인천에서 대한특수목재(개인회사)라는 제재소를 설립해 독자적 자립의 길로 나섰다. 국제상사 근무당시 인천에 있는 신영목재(대표 허병문, 대성목재출신)에 말레이시아산 원목 수입대행을 해준 인연으로 허병문 사장의 제재소를 임대해 대한특수목재라는 간판의 제재소를 차렸다. 이범수씨는 “대한특수목재라는 회사명은 전주의 대한특수목재에 참여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같은 이름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영업으로 타 업체의 거래처를 빼앗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23년간 남양재 제재소를 운영했으나 안타깝게도 친구회사에 어음 6억원을 빌려준 것이 잘못돼 2011년 10월 회사를 정리했다. 곰달래 서각회 회원이기도한 이범수 대표는 서각에 대해서는 전시회에 참여할 만큼 수준급 실력을 갖고 있다. 현재 청계산 근처에서 조그마한 서각재 회사를 차리고 안동 등으로 서각재를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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