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대한특수목재
1980년대, 후로링 보드 제조
전북 전주(全州)에 대한특수목재(회장 김한태)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천에 사명(社名)이 같은 회사인 대한특수목재(대표 이범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의 대한특수목재 창업자 김한태 씨(1922년생, 2011년 작고)는 전북 임실 출신으로 그의 나이 59세 때인 1980년 전주(全州) 공단에 4천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대한특수목재를 설립했다. 전주의 대한특수목재는 국내 최초로 국내산 낙엽송으로 후로링 보드를 제조했으며 1981년 KS표시 허가도 받았다. 당시 전국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마루 바닥재의 30%정도를 대한특수목재에서 공급했다.
1986년 한국목재공업협동조합이 조달청과 체결한 후로링 보드 단체수의계약에 전국의 후로링 보드 제조업체 8개업체와 동참해서 1988년까지 조달청에 KS후로링 보드를 납품했다.

경찰 출신 김한태 회장
대한특수목재(정식명칭은 대한특수목재 공업사) 김한태 회장은 전북 임실이 고향이다. 1950년 경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경위로 시작해서 10년간 근무하다 전북도경 형사계장을 끝으로 퇴임했다. 그는 퇴직경찰관으로 마땅한 취직자리도 없고 또 월급쟁이를 더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집안이 부농이어서 1만평이 넘은 논밭이 있었는데 농사를 짓느니 산을 사서 조림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시는 산 값이 쌀때라 논 600평이면 20만평 가량의 임야를 살 수 있는 때였다.
그는 등산을 좋아해서 산에 오를 때 마다 헐벗은 산을 안타까워했는데 조림을 하면 더디기는 하나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61년(그의 나이 34세)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 대덕산의 60만평 정도의 임야 를 구입하고 낙엽송과 잣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나무는 적어도 30년 정도 지나야 수익성이 나기 때문에 조림을 계속하면서 생계를 위해 표고버섯도 재배했다. 한때는 30만본의 표고목을 갖고 전문적으로 재배하고 축산도 하는 등 자급자족하면서 10년만 버티면 육림사업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김 회장은 자연이나 환경을 보전한다는 큰 뜻도 중요하지만 육림사업은 경제적으로 유명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림을 하면서 1963년에는 산속에 목재공장을 만들었다. 계획 조림을 하면서 베어내는 잡목들을 처리해서 수익도 얻고 앞으로 본격 생산할 목재를 가공하는 기술과 판로를 미리 익혀두기 위한 뜻에서였다.

독림가, 김한태 회장
김한태 회장은 진안군 대덕산 뿐 아니라 전북 임실의 성수면 성수산에 120만평의 임지를 구입해서(1964년) 조림을 하기 시작했다. 진안과 임실의 산지 657만평에 35년 동안 329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개인으로는 국내 최대의 조림 실적이다. 1985년에는 성수산 임지에 성수임업연구원을 개설하고 수영장, 체육시설, 합숙소 등을 마련해 농림계 학생들에게 무료로 개방했고 학생들이 버섯 등 산지 작물재배와 목재가공 임업기계의 실습을 하면서 자연환경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산림욕을 겸한 낙엽송 휴양림을 만들어 산림청으로부터 국민관광 휴양림 허가를 받기도 했다. 김한태 회장은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개재돼 있을 만큼 나무를 진정으로 아끼는 대표적인 애림가였다. 그는 한국임산협회 회장과 조림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전주상공회의소 부회장 전북레스링협회 회장을 맡아 지역 사회활동도 했다. 독림가로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상훈을 받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1995년(그의 나이 74세때) 쌍방 보증 등으로 부도가 나서 휴양림은 산림청에 넘기고 대한특수목재는 폐업을 했으나 그의 나무사랑 정신은 영원히 기리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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