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림목재 XIII
● 이경호 대표, 목재 외길 35년
35년간 목재산업 현장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목재를 보고 만져봤다는 영림목재 이경호 대표(1950년 1월생)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이다.

6.25 전쟁이 터지자 모친의 등에 업혀 진도로 피난을 온 뒤 6~7년이 지나 인천으로 오게 됐다. 인천에서는 송월동 피난민 거주지 단칸방에 살면서 학교에 다녀오면 바닷가 근처로 나가 친구들과 조개를 잡으며 놀았다. 인천고등학교를 거쳐 중앙대학교에 입학해서는 미군부대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영어회화를 배웠다.
1975년 대학을 졸업하고 대우전자에서 3년간 직장생활을 한 이 대표는 1978년 부친이 경영하는 영림목재에 차장으로 입사하면서부터 목재와 인연을 맺었다. 영림목재는 이경호 대표의 부친(이영복 씨)이 1969년 설립한 목재회사로서 당시 10여 명의 직원을 둔 작은 제재소였다. 1978년 어느날 부친이 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지자 모친인 강영신씨가 아들인 이경호 대표에게 회사를 맡으라고 했다. 당시 제재소라고 해봐야 보잘 것이 없었다. 합판 공장에서 나오는 절단목을 사서 제재후 빵상자, 소주상자, 간장상자 등을 만드는 정도였다. 이 대표는 휴일도 없이 톱질과 못질을 해가며 목상자를 만들어 팔았다. 하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오래 가지 못한다’라고 판단한 이 대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당시 냉장고, TV 등 가전제품이 봇물처럼 생산되고 있는 것을 감지한 이 대표는 가전제품용 파렛트를 만들어 납품할 것을 결심했다. 파렛트를 만들기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에 냉장고용 파렛트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당시 4개 업체가 삼성전자에 파렛트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들 업체들은 수원 삼성 공장내에 입주해 파렛트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신규업체로 참여한 이 대표는 인천에서 만들어도 삼성전자에 입주해 있는 업체들보다 더 빨리 납품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파렛트는 제품 크기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삼성전자는 하루에도 수차례 크기가 다른 파렛트를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는 주문받은 제품을 야간 운송으로 아침 작업시간 전까지 수원공장에 가져다 놓았다. 당시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화물트럭은 예외여서 트럭 3대로 밤새 제품을 옮겼다. 파렛트를 납품할 거래처가 하나둘씩 늘면서 영림목재의 규모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경호 대표는 1983년부터 악기용 원자재인 북미산 특수목을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 국내 악기 업체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었는데 악기용 원자재인 북미산 건조 제재목을 모두 일본 업체를 통해 들여오는 것을 알고부터였다. 이 대표는 캐나다로 건너가 맥밀란社와 계약을 맺고 악기용 원자재인 건조 제재목을 수입해 삼익악기에 납품했다. 이 대표는 88서울 올림픽 이후 국민들의 소비 취향이 고급화되기 시작하자 가구용 특수목을 들여오면서 수입 수종이 다양해졌고 거래 국가도 많아졌다. 이 대표는 해외 출장길에 오를 때마다 달력이 들어있는 큰 가방 하나를 들고 갔다. 캐나다와 미국, 중남미, 인도네시아 등 산 속에 있는 제재소를 방문해서 제재소 사무실에 영림목재 달력을 걸어두기 위함이었다. 한샘에 부엌가구 반제품을 공급하면서 회사 규모는 매년 두배이상 커졌다.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1992년 말에는 25억 여원을 투입, 인천 남동공단 3000평 부지에 14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이 대표를 단숨에 곤경에 빠트렸다. 200억원대에 이르던 매출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거래처도 2/3으로 줄었다. 게다가 15억여원의 부도도 맞았다. 환율 급등으로 은행 결제금액은 두배로 올랐다. 주변에서는 회사문을 닫는 게 더 낫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회사에 쌓여있는 원목 및 제재목 더미가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콜트악기에 찾아가 악기용 원목 중 최상급만 골라서 20% 싼값에 팔겠다고 제안해 3억원 어치를 팔기도 했다.

참고자료 : <영림목재, 마흔 나이테>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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