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림목재 Ⅴ
● 이현의 이사와 중국 연변에 가다
현경목재 이현의 대표가 영림목재 이사직으로 있을 때인 1994년의 일이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정식 수교를 한지 2년째 되는 해였다. 필자는 ㈜코마의 대표였을 때인데, 이현의 이사가 중국 길림성 화룡임업국에 비즈니스차 갈 일이 있다고 하기에 필자는 중국에 특별한 볼 일은 없었지만 함께 가자고 했다.
1994년 1월 6일 추운 겨울날이었다. 영림목재 이현의 이사와 영림목재 거래처 사장 2명, 필자 4명이 심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심양에서 1박한 후 다음날 우리 는 심양역에서 연길역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심양에서 연길까지 가려면 비행기로 가는 방법도 있었는데,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었다. 심양에서 연길역까지는 1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2등칸을 탔고 2등칸은 컴파트먼트식으로 침2층 침대가 양쪽에 놓여있는 4명이서 잘 수 있는 방이었다.
오후 4시쯤 탔으니 심양역을 조금 빠져나오자마자 날이 어두워져서 바깥구경을 별로 할 수 없었다. 1월 초순이면 한국도 무척 추울 때인데 신의주보다 북쪽인 연길은 몹시 추웠다. 아침 7시 연길역에 도착할 즈음 2등칸 말미에 있는 세면실로 세수를 하러 갔지만 더운물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는 제복 입은 여차장에게 “왜 더운물이 나오지 않습니까?”고 물었더니 찬물이라도 나오는 것이 다행이라고 답했었다. 어떤 때는 모두 얼어붙어 찬물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세수를 하고 나오면서 뒷 켠에 있는 3등칸을 쳐다봤더니 60년대 우리나라 완행열차 3등칸과 모습이 비슷했다. 둘이 앉아야 할 의자에 세 명씩 앉았는가 하면 짐칸에 올라가 드러누워 자고 있는 사람,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있는 사람, 서서 졸고 있는 사람, 60년대 우리나라도 그러했다. 연길역에 도착해서는 봉고차를 타고 화룡임업국으로 갔다. 길림성에는 16개의 국(局)이 있는데 화룡임업국이 가장 크고, 나무도 가장 많다고 했다. 화룡임업국은 목재공장 3개(제재공장, 젓가락공장, 집성목공장)를 운영하고 있었다. 중국의 임업국은 우리나라 지방산림청과 같은 것인데 중국 임업국의 권한은 대단히 컸다. 임업국 관할에 경찰도 있고, 학교와 병원, 호텔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임업국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3개 목재공장을 차례로 둘러봤다. 그 중 관심이 쏠리는 곳은 오크 집성목 공장이었다. 연변에서 자란 오크(참나무)로 집성목을 만들고 있었는데 모두가 자동시스템이었다. 일본이 투자해 지은 공장이라고 했다.

● 화룡임업국과 가구공장 합작 시도
영림목재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되기 전부터 화룡임업국으로부터 오크 원목 및 오크 집성목을 수입하는 등 거래가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 9월, 영림목재 이경호 사장(당시 45세)은 화룡임업국과 합작으로 대련에 가구공장을 짓기로 합의했다. 총 자본금 200만$ 중 중국 측(화룡임업국)이 50%, 한국 측(바로크가구 30%, 영림목재 20%)이 50%를 출자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합작투자 의향서(가계약서)까지 작성해 서명까지 했다. 합작투자의향서는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돼있어 대련에 대지 6000평, 건평 2300평 규모의 가구공장을 짓고, 원목의자, 원목식탁 및 가구소품류 등을 1995년 3월부터 생산에 들어가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그해 10월 화룡임업국 주요 임원 일행들은 비행기를 전세내서 한국에 와서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다. 그러자 당시 국내 유명 가구업체들은 화룡임업국에 투자할 의향을 보였고, 화룡임업국측은 바로크, 영림과의 합작 의향서를 까맣게 잊은 채 그들과 별도의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 유명가구업체들은 투자의향만 보였을 뿐 아무도 구체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화룡임업국은 바로크와 영림에게 합작을 다시 제안했었지만 배신감을 느낀 영림목재 이경호 사장은 없던 일로 하자고 단호히 거절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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