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림목재㈜ Ⅲ
● 1986년, 영림목재 법인 전환
1986년은 우리나라가 아시아 올림픽을 개최한 해로써 영림목재의 매출도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자 이경호 전무는 이제까지 개인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의 비약적인 도약을 위해 1986년 8월 19일, 회사의 법인화를 단행했다.
발기인으로는 이경호(현회장), 강영신(이경호 회장의 모친), 김세훈, 박희범, 박인서, 이현의, 왕덕균 7명이었고, 자본금은 7000만 원으로 시작했다.
대표이사로는 이경호 현 회장(당시 나이 37세)이 선임됐고, 감사에는 성병주 씨가 선임됐다.

● 연안부두 목재제품사업부 사무실
1992년 영림목재가 남동공단으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인천시 항동(연안부두)에 영림목재 목재제품사업부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 제품사업부 사무실은 마치 목재 전시실을 방불케했다. 사무실 벽면 전체를 각종 수종의 나무로 부착해 놓았다.
스프러스, 엘더, 오크, 애쉬, 메이플, 월넛 등 미국 수종은 물론 니아토, 젤루통, 세파티아 같은 남양재 특수목 등으로 벽을 장식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경호 사장의 목재수종에 대한 연구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경호 사장은 필자가 1986년 펴낸 『수입목재의 규격과 성질』이란 책-소위 말하는 노란책(표지가 노란색이어서 당시 사람들은 노란책이라고 불렀다)을 200권이나 사주었다.
필자가 이 책을 발간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경호 사장은 책이 발간되기도 전에 200권에 대한 대금을 미리 지불해줬다. 당시 500권 발간비가 300만 원 정도였는데 200만 원의 선금을 받은 것이다. 필자로서는 발간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0권이나 되는 책을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했더니 미국, 중국 등을 방문할 때 현지에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림목재 박인서 부장은 연안부두 제품사업부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당시 본사는 도화동에 있었지만, 제품사업부 사무실은 연안부두에 있었습니다. 당시 멕밀란社의 에이전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종 북미산 원목과 제품들은 이곳에서 관리를 하였지요. 영림목재가 인천 목재업계에서 족적을 남길만한 일은 북미산 특수목을 수입하였다는 것이지요. 북미산 특수목을 수입한다는 것은 재정적 배경이 든든해야 했습니다. 북미산 특수목은 단위 단가가 워낙 비쌌으니까요. 이경호 사장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한국 파렛트풀(KPP)에 지분참여
영림목재(주) 이경호 사장(당시 40세)은 또 한번의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는데 ‘한국 파렛트풀(KPP)’ 주식회사에 지분참여를 하고 파렛트를 납품하는 것이었다.
이경호 사장은 물류社의 국내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서병륜 회장을 만나 물류사업의 중요성과 장래성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KPP社의 협력사이자 투자자인 일본의 ‘Japan Pallet Rental(JPR)’社의 ‘시카이 겐지’ 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JPR의 일본지역 대리점들을 일주일간 방문하여 직접 현장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는 곧 물류사업이 미래산업의 주축이 될 것임을 확신하고 귀국해 KPP社에 지분참여 및 파렛트 납품을 결심했다. 당시 KPP社에 파렛트를 납품하면 1년짜리 어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웬만한 자본능력이 없으면 참여할 수 없는 사업이었고 일 년 동안 계속 납품만 하고 일 년 후에 돈을 받는다는 것은 상당부분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PP社에 납품을 결심한 것은 이경호 사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 연안부두에 보세창고 신축
영림목재 이경호 사장은 KPP社에 파렛트 납품사업을 시작하고 계속 파렛트를 제작하여 납품하면서 창고와 야적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마침 서울의 유명한 여의사가 연안부두에 소유하고 있던 땅이 매물로 나왔다. 이경호 사장은 곧바로 그 땅을 계약, 인수하고 그 자리에 천정크레인과 스프링쿨러까지 갖춘 창고를 신축했다. 그당시로써는 최신식의 보세창고였다.

참고자료 : <영림목재, 마흔 나이테>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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