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화 대표
합판에 관해서는 거의 모든 제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동서합판은 E₀급 친환경 합판 취급을 제일 먼저 시작한 기업이기도 하다. 또한 MDF, 방부목, 구조재, 비규격 제품 등과 더불어 황암토라는 석재를 이용한 타일까지 다양한 건축자재를 종합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시장에 대응하는 발 빠른 움직임과 다양한 재고를 경쟁력으로 목재산업에서 오랜 시간 장수하고 있는 동서합판. 맨주먹으로 시작한 김교화 대표는 특유의 뚝심과 성실함으로 오늘날의 동서합판을 일궈놓았다.
 

 

 

 

맨주먹으로 오늘날 동서합판까지

동서합판 김교화 대표은 40여 년간 합판시장의 흥망성쇠를 지켜봐온 한국합판산업의 산 증인이다.

1968년부터 외삼촌이 운영하던 대화합판에서 목재일을 시작했던 김교화 대표는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얻는 방법을 터득했고 영업사원으로서 앞서갔다. 1972년 대화합판의 부도로 독립을 하게 된 그는 단돈 18만 원을 손에 쥐고 점포도 없이 합판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다. 그 후로 영등포에 10평 남짓 점포를 얻어 남서울합판으로 조금씩 세를 확장해가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물량 부족으로 합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당시, 500만 원 상당의 합판 구매 계약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때의 500만 원이면 집 아홉 채를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살 길이 막막해 자살까지 생각했었으나 돌을 맞은 아들을 보며 오뚝이 같이 다시 일어났고 그해 가을에 그 빚을 다 갚고야 말았다. “김교화가 쫄딱 망했다”라며수군대던 사람들은 그의 오기와 수완에 탐복을 마지않았고 이는 김 대표에 대한

자자한 명성으로 이어졌다. 김 대표는 “그때 그렇게 사기를 당하지 않았으면 그런 명성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그 후 상록합판과 아세아합판을 거쳐 1974년 잠원동에 차린 것이 지금의 동서합판이다.

선우목재, 동화기업, 원창홍업, 선경 등의 대리점을 취득해 합판을 공급해오던 동서합판은 1997년 인도네시아 반잘마신의 합판제조공장을 인수해 특수합판을 생산하기도 했다. 또한 동서프리폼이라는 자회사를 차려 도어, 문틀을 취급하기도 했다.

 

 

 

‘007 가방 영업’으로 확실한 눈도장

김교화 대표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뚝심 있는 영업방법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는 남보다 일찍 일어나 바지런히 발품을 팔아가며 일을 했다.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 발품은 곧 빠른 정보요 이는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독특한 영업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007 가방 영업’이다. 그는 007 가방에 각종 제품의 샘플을 잔뜩 넣어가지고 다니며 영업을 했다. 샘플 중에는 염색각재, 마음대로 휘어지는 합판 등 독특한 제품들도 속해 있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김교화’ 하면 ‘007 가방’을 떠올리며 그를 쉽게 기억해 주었다고.

 

 

나의 고향, 쇠꼴마을

쇠꼴마을 전경
김교화 대표가 아픈 동생의 요양을 위해 78년 젓소 6마리로 시작한 농장이 지금은 무려 7만 평짜리 종합관광농원 ‘쇠꼴마을’이 됐다.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쇠꼴마을은 그의 동생을 향한 애절한 마음과 경쟁에서 벗어나 자연의 품에 안기고픈 회귀본능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가 30년 간 피땀으로 일궈 온 쇠꼴마을은 황포돛배 뱃놀이, 억만 송이 배꽃 축제 등 지역 향토문화와 접목한 문화 컨텐츠로 매해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쇠꼴마을의 높아진 위상으로 2004년 농림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교화 대표는 얼마 전 여성인력개발원의 농촌체험지도사 양성과정에서 4시간 동안 열강을 할 만큼 아직도 열정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합판사업이든, 농장이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성공비결은 “그저 그 일에 미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 그는 여전히 ‘젊은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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