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진 회장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맨주먹으로 부산으로 가서 갖은 고생과 노력 끝에 성공해 수출한국의 금자탑을 이루며 국가를 위해 기여한 바가 지대했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만은 불효자식이란 죄의식 속에서 살고 있었다. 왜냐하면 부모의 유택이 공동묘지에 모셔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국가경제 발전과 함께 국민생활여건이 한 층 좋아져, 조상의 얼을 되살리려는 사회 풍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강석진 회장 역시 부모님을 떠올리게 됐고, 가난으로 인해 공동묘지 이곳저곳에 두었던 부모님의 유택을 한 곳에 옮기는 것이 부모님께 할 수 있는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문화재단을 설립해 고등학교와 대학을 설립하고 불원(佛院)을 지어 부모님의 분묘를 모시는 것을 구상했다.
 1969년, 학원설립 인가신청과 불원 창건을 추진하면서 용당동 10만여 평의 임야에 부지 조성를 조성하고 동명불원(東明佛院) 공사에 착수했다.
 이탈리아에서 값비싼 대리석들을 수입하고 강원도에서 크고 비싼 돌들을 모두 사들여 절 주변과 입구 1㎞까지를 모두 바위만한 정원석으로 쌓아올렸다. 그러자 항간에서는 이 절을 짓는 데 수십억 원의 돈이 쓰인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은 부산 시민과 세인들에게 강 회장이 호화분묘를 만든다는 소문으로 확대됐고 끝내는 강 회장이 감내하기 힘든 뼈아픈 고통으로 이어졌다.
 1976년 8월 초, 당시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강석진 회장을 소환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불원에 설치된 석물(石物)이 보사부령이 정해놓은 기준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부산의 여론이 나빠지고 있으니 동명불원을 부산市에 기증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8월25일, 4차 소환을 당한 강 회장은 ‘거절하면 동명의 모든 기업이 풍지박산될 것’이라는 협박 분위기 속에서 동명불원을 부산市에 기증하겠다는 각서를 쓰게된다.
 기증각서를 입수한 부산市는 동명목재상사의 인감을 보관하고 있던 담당임원을 위협해 동명과 부산 시 사이의 증여계약서를 작성했으며 1977년 1월13일, 동명불원 재산 일체의 소유권을 부산시로 이전등기했다.
 그날 저녁 강 회장은 동명불원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고갯마루에 자동차를 세우고 혼자서 왼쪽 산기슭으로 뚜벅뚜벅 걸어 올라갔다. 그곳은 동명불원의 적지(適地)를 결정할 때 올라왔던 용당동 507번지의 용마산 서북향 산록이었다.

김상혁 wwic@hanmail.net

[2010년 5월 16일 제 2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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