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시장을 몰고 다니는 ‘마이더스의 손’
프레임미가 노상철 대표이사

Image_View액자업계에서 신일프레임 노상철 대표이사는 ‘마이더스의 손’이다. 그가 시작하는 사업은 어김없이 다음 번 시장 트렌드의 핵이 됐다. 36년 전 액자사업을 시작하면서 벌써 여러 번 확인된 사실이다. 그래서 노 대표이사가 하는 것이라면 업계서는 마치 ‘신 시장 개척의 지침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런칭 1년 만에 200%라는 신화적인 매출신장률을 보인 가장 최근의 인테리어 사업 ‘프레임미가’가 또한 그러하다. 액자와 인테리어 몰딩은 한 끗 차이다. 테두리에서 그림을 돋보이게 하느냐 공간을 돋보이게 하느냐의 문제일 뿐.

프레임미가의 탄생배경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MBC건축박람회에서 폐스티로폼으로 만든 액자를 선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을지로 건자재 상들이 벽에 응용할 요량으로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노상철 대표이사는 본격적으로 인테리어 전용 몰딩개발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6년 초에 개최된 경향하우징페어에서 첫 선을 보였다.

전시회에서는 부스비용보다 설치비용에 더 많이 투자해, 상품의 컨셉과 활용도가 충분히 소비자에게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급스러움과 독창적인 스타일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더욱 몰딩과 직접적인 인테리어 연관성을 갖는 벽지 디자인 트렌드가 최근 2~3년 새 장식성이 상당히 강한 회화적 요소를 풍부하게 갖고 있어, 상황은 요철처럼 잘 들어맞았다.

“우리가 기존시장에는 없는 앞선 몰딩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해외 유수의 액자업체들과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입니다. 액자를 수출하면서 그들의 첨단 디자인 감각을 받아들일 기회가 많았고, 이렇게 쌓인 노하우가 몰딩 디자인에 반영된 것입니다.” 
기존 액자생산라인을 활용했기 때문에 특별한 투자비용은 발생하지 않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가 회사매출을 껑충 뛰게 한 셈. 현재 프레임미가는 이 회사 매출의 40~5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 회사의 연간매출이 약 130억 원 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액수다. 지난 1년 여간 전용 커팅기와 접착제를 개발하고, 재고를 보유하며 지속적인 신상품을 출시하는 등 소비자뿐 아니라 시공자까지 만족시켜야하는 건축인테리어 자재시장의 성질도 이미 파악하고, 현재는 또 다른 인테리어 관련 상품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노상철 대표이사의 삶은 액자인생이다. 전남 함평의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2004년 100억 원 대의 매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중견 액자제조업체의 대표이사가 되기까지는 한 인간의 성공 스토리를 보는 듯하다. 시야를 넓혀 흐름을 읽되,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선택과 집중’이 오늘 날의 그를 있게 했다.
“다른 사업가들보다도 해외출장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액자 등 관련 전시회만  찾아다니지 않고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분야도 다양하게 접하고 있습니다. 사업 아이디어는 내 분야만을 득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Image_View
몰딩 부문 약 60억 원 매출, 차기 상품은?
그가 액자사업을 시작한 것은 1971년 21세 때. 당시 신일상사라는 이름으로 목재액자제조와 함께 서울시내 전 지역의 공중전화박스 유리를 갈아 끼우는 일을 병행했다. 시위가 많았던 때라 공중전화박스로 벌어들인 금액은 연간 5억 원 이상이었다. 그러나 경쟁 입찰 등으로 매출이 떨어지자 과감히 사업을 접는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노상철 대표이사가 선택한 것은 알루미늄 액자였다. 목재로 만들던 액자시장이 알루미늄으로 소재가 교체되기 시작했던 것.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최로 액자시장은 컸다. 주문량이 늘어 밤 12시를 넘기는 것은 물론 주말에까지 일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때 번 돈으로 파주시 장곡리에 1억2000만 원을 들여 공장부지 2040㎡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저작권자 © 한국목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